[오늘의 DT인] "디자인은 배려의 학문… 큰할아버지가 세운 백병원서 많이 배웠죠"
서울대서 디자인 전공후 美 유학
병원내 디자인실 20년 이상 운영
생소했던 '병원디자인 분야' 개척
폐원 막으려 대학총장 선거 출마
글로벌 K메디컬 허브 조성 제안
백진경 인제대 멀티미디어학부 교수
"제 분야에서만 열심히 하면 학교에서 제가 할 일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학교를 설립하신 분들의 뜻에 맞게 유지해나가는 게 중요하겠더라고요."
서울백병원이 이달 31일까지 진료를 종료하고 폐원하겠다고 밝히면서 백진경(64·사진) 인제대 멀티미디어학부 교수는 큰 결심을 해야만 했다. 백 교수는 고(故) 백낙환 인제학원 이사장의 차녀이자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선생의 종손녀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학업을 마친 1988년 서울백병원 내에 디자인실을 만들어 20년 이상 운영해왔고, 1999년부터는 인제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디자인에만 매진해오던 백 교수는 최초 민립 공익법인인 백병원이 사라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설립자의 후손으로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형제들과 상의 끝에 인제대 총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3일 서울 중구 디지털타임스 회의실에서 만난 백 교수는 "서울백병원 폐원이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는 이유는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병원이라는 점과 백인제 외과병원에서 시작돼 맥을 이어온 외과의 명성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학교 입장에서도 그렇고 인제대 부속 다른 병원들도 적자로 돌아서게 되면 문을 닫을 수는 없지 않나"라며 "서울백병원을 당장 폐원하기보다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다각도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같은 의견이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게 된다면 힘이 될 것"이라며 인제대 총장에 입후보한 이유를 설명했다.
백 교수는 지난달 초 서울시에 서울백병원을 글로벌 K메디컬 허브로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경영하시는 분들은 다른 어려운 문제가 있겠지만, 코로나19 때도 서울백병원이 공공의료기관으로서 역할을 감당하며 진료소 역할을 톡톡히 했어요. 특수클리닉이나 응급의료센터 같은 역할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 명동엔 중국인뿐 아니라 세계 각국 사람들이 다 오더라고요. 금방 좋아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아버님 지인과 이번 사태를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여러 조언을 해주시는데, 그런 것들이 현실화되면 폐원을 좀 늦추든지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백 교수에게 서울백병원 부지는 무척 특별했다. 그는 "지금 병원 자리에 큰할아버지 댁과 저희 할아버지 댁이 있었고, 저도 초등학생 때부터 병원을 지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며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는 병원에서 쭉 근무를 했으니 제겐 아주 소중한 곳"이라고 전했다. 또 "기업으로 치면 발상지 같은 곳이기에 서울백병원은 평생 그렇게 존재할 줄 알았다"고 했다.
"큰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서울백병원을 사유재산이나 수익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두 분이 계셨어도 이런 결정을 했을까'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더 큽니다. 좋은 방안이 있다면 서로 공유하면서 존립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백 교수는 서울대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후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 석사학위, 세종대에서 디자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과 미국 대학원에서의 헬스케어 디자인 프로젝트 수행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최초로 병원 내 디자인실을 만들었다. 첫 프로젝트로 병원의 이미지통합을 진행한 것과 동시에 1989년 개원 예정이던 상계백병원을 위한 사인 시스템 작업을 병행했다. 디자인실을 운영하면서 당시 생소한 분야이던 병원디자인 분야를 개척하고 정보디자인, 사인디자인, 환경디자인, 환자 서비스 관련 등의 병원디자인 실무도 진행했다.
1999년 인제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에도 디자인을 중심으로 한 헬스케어 디자인 융합연구를 선도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한국색채학회 회장과 한국디자인학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현재 인제대 디자인연구소 소장직과 함께 한국헬스케어디자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올해는 제2회 공공디자인페스티벌 조직위원장에까지 임명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백 교수는 "저희 연구소에서 의료·경영·심리학 분야의 박사들과 같이 일을 많이 해서 실적도 쌓이고 개인적으로 배운 것도 많다"며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디자인학회장까지 할 수 있었는데 올해 공공디자인페스티벌이 부산에서 열려 교집합이 맞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페스티벌 주제는 유니버설 디자인이에요. 유니버설 디자인은 배리어 프리 개념을 넘어서 장애인, 외국인, 노약자가 다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관점의 디자인라고 저는 생각해요. 사람들의 안목이 높아진 만큼 공공디자인도 좀 더 안정적이고 편리하게 행해져야 합니다. 눈에 전혀 거슬리지 않고 생활에 밀착돼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느낌이 중요하죠."
백 교수는 디자인을 '배려의 학문'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디자인이 사실 여러 분야를 조율하고 안 되는 걸 되게 해야 하는 쉽지 않은 분야"라며 "클라이언트 요구를 제한된 환경에서 어떻게든지 맞춰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디자인이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백 교수의 말에는 디자인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겼다.
아울러 "공공디자인페스티벌이 10월 19일 부산 F1963 중정에서 개막해 전국 102곳에서 펼쳐지니 온 가족이 와서 다양한 디자인 체험을 하길 바란다"며 "경치 좋은 부산이 안전하고 여러 기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는 걸 확인한다면 2030 부산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박은희기자 ehpark@dt.co.kr
사진=박동욱기자 fuf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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