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이라고 악당을 다 피해갈 수 있으랴
[[휴심정] 원철스님의 소엽산방]
7월 마지막 주와 8월 첫째주는 이른바 ‘여름휴가’기간이다. 춘원 이광수(1892~1950) 선생은 서울 종로구 홍지동의 소림사에서 1934년 여름휴가를 보냈다. 그것도 2주일 정도가 아니라 7∙8월 두달 동안 유숙했다. 이쯤 되면 템플스테이가 아니라 템플리빙이다. 사찰에 ‘머물렀다’가 아니라 ‘살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사실 처음 목적지는 절이 아니었다. 두 딸이 홍역에 걸린 것을 핑계 삼아 명사십리 해당화로 유명한 동해안 원산 해수욕장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밤기차를 타고 혼자 가겠다고 하니 안주인이 펄쩍 뛰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휴가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쌌던 짐을 풀지도 않고 그대로 들고 간 곳이 소림사였다.
소림사의 원래 이름은 소림굴이다. 이름 그대로 바위굴이 유명하다. 조선을 건국하기 전 이 굴에서 기도한 인연을 가진 태조 이성계의 후원으로 1396년 혜철(慧哲)대사가 창건했다. 굳이 이름의 기원을 추적하자면 중국 달마대사의 소림굴이라 하겠다. 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후 굴 안에서 9년간 벽만 쳐다보고서 명상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중국 소림굴의 조선판 버전인 셈이다. 1817년 중건하면서 현재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두 번 정도 언급될 만큼 600여년의 긴 역사를 지녔다. 중국 하남성 정주(鄭州)의 숭산 소림굴도 소림사로 바뀌었다.
소림굴의 ‘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김형규(金衡圭 1861~1935)의 ‘청우일록(靑又日錄)’에 나온다.
“계곡아래에서 세수를 하고 소림사를 살펴보았다. 절 뒤에는 큰 바위가 있었으며 바위 가운데 굴이 있었다. 이상히 여겨 물었더니 동자승이 ‘이 곳은 달마대사가 머물던 자리’라고 대답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위모양은 마치 부채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구부러져 있었고 그 가운데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었다. 어찌 기암이 아니겠는가?”
청우선생은 세도정치 시절의 인물인 장동김씨 김병운(1814~1877)의 외아들이다. 1873년에서 1887년까지 11년간에 걸친 정치적 내용까지 포함한 기록물인 ‘청우일록’을 남겼다. 정확성과 객관성으로 자료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기라고 하겠다.
춘원선생도 한낮의 더위를 피해 소림굴 안으로 수시 출입했을 것이다. 그리고 틈 나는대로 동네로 산책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마음에 드는 터를 발견했다. 감나무가 서 있는 150평 정도의 작은 밭이었다. 세검정 계곡의 물소리와 앞쪽의 백악산 인왕산 그리고 뒤쪽의 북한산이 감싸고 있는 명당이다. 별장을 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신문사 부사장으로 근무하면서 잘 나가던 때였다.
예나 지금이나 집을 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집 한 채 짓고나면 10년 늙는다는 말이 그냥 나온 소리가 아니다. 생각지도 않던 암반이 돌출했고 이를 제거하느라고 추가비용은 늘어만 갔다. 겪어보니 공사업자도 그렇게 믿음을 줄만한 인물이 아니였다. 모르긴 해도 집을 지으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던 모양이다. 얼마나 미웠으면 업자의 이름까지 ‘성조기(成造記)’란 글 한편에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남겨 두었을까. 적지않는 비용을 사기 당하기도 했다. 마음고생으로 인하여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보다못한 안주인이 나섰다. 북촌일대를 개발하여 근대식 작은 평수의 서민한옥을 분양하던 정세권(鄭世權 1888~1965)선생과 연결되었다. 그이에게 일을 맡기고서야 모든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그날부턴 그야말로 팔짱끼고 매일 집짓는 일꾼들의 땀 흘리는 모습을 구경만 해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 날마다 아침이면 공사장으로 구경을 왔고 해가 진 뒤에야 집으로 내려갔다.
얼마나 좋았던지 집이 완공도 되기 전에 이사를 했다. 착공한지 백일쯤 될 무렵이다. 유리문과 차양막 그리고 전등시설도 이사를 한 뒤에서야 공사를 이어갈 정도였다. 이 집에 대한 애착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기초공사를 하면서 바위를 깨다가 두 곳에서 발견한 샘물에 대한 찬사도 빠트리지 않았다. 단 맛이 나는 맑은 물은 한 가족이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양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던 ‘ㄷ자 한옥’에서 1934년부터 1939년 5월까지 5년정도 밖에 살지 못했다. 부득이한 개인사정으로 집을 팔고서 결국 효자동 본가로 돌아와야만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집주인이 바뀌었다. 다행이도 1972년 현재의 주인에 의해 다시 개축되었다. 이 집의 매입자가 개보수를 거쳐 복원했으나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한 덕분에 근대화된 한옥양식을 보여주는 건축학적으로 가치있는 건물로 인정 받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별장문화를 엿볼 수 있는 집으로서 2004년에 국가등록문화재 제87호 ‘서울 홍지동 이광수 별장터’로 지정되었다. 두 곳의 샘물과 ‘삘 꽂힌’ 감나무는 그대로 남아서 그 시절을 말없이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춘원이 직접 옮겨 심었다는 향나무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더불어 한국문학사에서도 의미있는 터로 자리매김 되었다.
여름 장맛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한옥에서 떨어지는 낙수물 소리와 함께 앞산의 운무를 바라보는 전망도 일품이다. ㄷ자 한옥의 왼쪽날개 부분은 창 넓은 누각형 서실로 사용하면서 ‘춘원헌(春園軒)’이라는 액자를 달아놓았다. 공개하지 않는 개인주택이지만 다행이 집주인의 배려로 집안을 둘러볼 수가 있었다. 종로구 여기저기에서 활동하는 도반 몇 명과 함께 주말에 잠깐 스쳐가듯 ‘한옥 스테이’를 한 셈이다. 소림사와 춘원별장 그리고 현재의 주인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글 원철 스님(불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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