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식량가 뒤흔들어 놓고···“러, 값싼 자국산 곡물로 개도국 회유”
지난달 흑해곡물협정 연장을 거부한 러시아가 세계 식량 위기를 고조시켜 개발도상국들을 자국에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려 한다는 경고가 나왔다. 곡물협정 중단 선언 후 보름 가까이 흑해 연안의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항에 포격을 퍼부어온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곡물 인프라 전반을 대상으로 공격 표적을 확대하고 있다.
2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유럽연합(EU)은 최근 개발도상국들과 주요 20개국(G20) 등에 서한을 보내 러시아가 식량 위기 와중 값싼 자국산 곡물을 무기로 개발도상국들을 자국에 종속시키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이 서한에서 “전 세계가 곡물 공급 차질과 가격 상승에 직면한 상황에서 러시아가 (식량안보에) 취약한 국가들에 접근해 할인된 가격에 곡물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며 자신들이 만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는 의도적으로 식량을 무기로 세계 식량 안보를 위협하면서 러시아에 의존하도록 하는 이기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보렐 대표는 러시아가 흑해곡물협정에 복귀하고 우크라이나의 농업 인프라 시설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도록 세계가 “명확하고 통일된 목소리”를 낼 것을 촉구했다.
EU의 서한은 러시아가 이번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아프리카 국가들을 상대로 외교 포섭전을 강화하는 와중에 EU 내부에서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두고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길이 막히자 EU는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동유럽 회원국들이 육로인 이른바 ‘EU 연대 회랑(Solidarity Lanes)’을 통해 더 많은 수출 물량을 받아주기를 희망하고 있지만,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은 값싼 우크라이나 곡물이 들어올 경우 자국 농업계가 타격을 받을 수 있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EU 연대 회랑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우크라이나산 곡물 일부를 흑해 대신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동유럽 EU 회원국의 육로를 거쳐 발트해 항구를 통해 수출할 수 있도록 한 우회로다.
다만 이 육로로 곡물을 수출하면 그만큼 운송비가 더 붙기 때문에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러시아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러시아가 이런 상황을 이용해 더 저렴한 가격으로 자국산 곡물을 세계 시장에 내놓을 것이란 얘기다. 최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 아프리카에 자국산 곡물 수출을 지속하는 한편 무상 곡물 제공도 병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아프리카는 전쟁 전 우크라이나산 곡물의 최대 수입처다. 푸틴 대통령은 정상회의에서 “신식민주의와 함께 맞서 싸우자”며 서방 대신 러시아의 편을 들어 달라고 노골적인 포섭전에 나섰다.
이날 러시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인 루마니아와 인접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항에 공습을 퍼부으며 우크라이나의 흑해 대체 수출로까지 공격 범위를 넓혔다.
올렉산드르 쿠브라코우 우크라이나 부총리는 루마니아와 국경을 맞댄 다뉴브강 항구 도시 이즈마일이 수십대의 러시아 드론 공습을 받아 중국·이스라엘·아프리카로 향하던 곡물 약 4만t이 피해를 봤다고 밝혔다. 이즈마일을 포함한 다뉴브강 항구들은 지난달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중단 선언으로 흑해 항로가 봉쇄된 후 대체 수출 창구로 활용돼 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는 세계적 재앙을 위해 전투를 벌이고 있다”며 “그들은 광기 속에서 세계 식량 시장 붕괴, 곡물가 위기, 공급 차질을 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날 포격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시카고거래소의 밀 가격은 한 때 5% 가까이 상승했다가 러시아산 곡물 수출량 확대 등의 영향으로 다시 하락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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