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보수 논객 “우리가 트럼프주의 키운 ‘그 나쁜 자들’이라면?”

이철민 국제 전문기자 2023. 8. 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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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졸자의 0.8%인 수퍼 엘리트대 출신 전문직 종사자들이 미국 문화 바꿔
‘능력주의’ 주장하지만, 중층 출신은 이길 수 없는 게임…상류층만 배타적 특권 세습
미 대중은 트럼프를 최고 전사(戰士)로 삼아 고등교육 계층에 저항하는 것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일 퇴임 후 세번째로 기소됐다. 그런데도 그의 미 공화당 장악력은 갈수록 커져서, 최근 뉴욕타임스(NYT)ㆍ시에나 칼리지 여론조사에선 공화당 대선 후보들 중 54%라는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가상 대결에서도, 43%로 동률을 기록했다. 2020년 대선 당시의 어떤 여론조사 보다도, 바이든에 대한 트럼프의 경쟁력은 강해졌다.

데이비드 브룩스

이런 ‘트럼프 현상’과 관련, 미국의 리버럴 언론사인 뉴욕타임스에서 중도우파 성향의 보수 논객으로 분류되는 데이비드 브룩스는 2일 ‘만약 우리가 바로 그 나쁜 자들이라면(What if We’re the Bad Guys Here?)’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이 신문에 게재했다. 브룩스는 국내에도 소개된 ‘보보스 인 패러다이스(Bobos in Paradise)’ ‘소셜 애니멀’ ‘인간의 품격(The Road to Character)’ 등 다수의 책을 쓴 저자다. 그의 NYT 칼럼에서 ‘우리’는 미국의 좌파뿐 아니라, 트럼프에 반대하는 공화당 기득권층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반(反)트럼프주의자’를 뜻한다.

브룩스의 질문은 ‘어떻게 이 자[트럼프]가 그 모든 범죄를 저지르고도, 어떻게 여전히 이런 정치적 경쟁력을 지닐 수 있느냐’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는 이에 대한 설명으로 ”미국 사회에서 반(反)트럼프주의자로 나선 ‘우리’ 기득권층이 문제일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트럼프주의자들은 세상을 후퇴하려는 반동주의(反動主義)자인가?

반트럼프주의자들이 트럼프 현상을 설명하려고 지금껏 내놓은 설명은 이러했다. “너무 불편할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공화당원들은 변화의 속도를 늦추거나 후퇴시키려 하지만, 유색인종이나 성(性)평등을 중시하는 여성이나 성 소수자들이 (낡은) 1963년 세상으로 복귀하길 원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논리를 따르자면, 비난을 받을 ‘나쁜 사람들’은 트럼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편견에 사로잡힌 반동(反動)주의자, 권위주의자들이다. 트럼프는 최고의 편견주의자이고, 그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편견을 수호하려고 트럼프를 지지한다. 반대로 ‘좋은 사람들’은 진보와 계몽 세력인 브룩스가 속한 반(反)트럼프주의자들이다.

◇배타적 세력의 특권이 세대 계승되는 ‘우리’만의 세계 구축

브룩스는 이런 견해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반트럼프주의자들인 ‘우리’가 “그 나쁜 사람들”이라는 반대의 논리를 폈다.

그는 높은 교양과 지성을 자부하는 반트럼프주의자들의 기원(基源)부터 짚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의 고교 졸업생들은 징집됐지만, 대학 재학생들은 입대를 미룰 수 있었다. 1970년대 흑백 통합교육이란 명분 하에, 보스턴의 흑인 노동계층 학생들은 백인 학생들이 있는 지역까지 매일 원거리 버스 통학을 해야 했지만, 웰슬리와 같은 보스턴 주변 부유층 지역에선 이런 원거리 통합교육이 강요되지 않았다.

브룩스는 “우리는 항상 사회 약자들을 대변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우리는 위 세상에 살고 그들은 저 아래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만 작동하는 체제를 구축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주의(meritocracy)’다. 이는 매우 객관적인 잣대같아 보이지만, 결국 고등교육을 받은 부모가 엘리트 대학을 나와서 끼리끼리 결혼하고 고소득 전문직종에서 일하면서 막대한 자원을 자녀들에게 쏟아붓는 시스템이다. 그 자녀는 다시 엘리트 대학을 가고, 끼리끼리 결혼해서 배타적인 계급 특권을 대대로 물려준다. 이른 바 ‘능력주의의 덫(meritocracy trap)’이다.

‘학업 성적’이라는 자질은 ‘우리’가 가장 많이 보유한 것이고, 모든 사람이 같은 룰(rules)에 따라 경쟁하는 것 같아도 오직 부유층만이 이기는 게임이다.

중층(中層) 출신 성인은 엘리트 대학 졸업생들에게 직장에서 뒤진다. 능력주의는 중층 계급에게 상향(上向) 기회를 박탈하지만, 소득과 신분 경쟁에서 진 이들의 능력 부족을 탓한다.

미국에서 능력주의는 그 사회의 신념체계가 됐다. 버락 오바마는 대통령 재임 중에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면서, ‘스마트(smartㆍ똑똑한)’이란 단어를 900번 이상 썼다. 그의 정책에 반대하고, 그처럼 하버드 로스쿨을 나오지 못하면 ‘멍청한(stupid)’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미국 대졸자의 0.8%인 ‘수퍼 엘리트대’ 출신이 사회 요직 장악

브룩스는 “지난 수십년간 ‘우리’는 이렇게 모든 전문 직종을 접수하고, 다른 사람들의 진출을 막았다”며 미국 언론사를 예로 들었다.

시카고대를 나온 브룩스가 1980년대 언론사에 입사했을 때에는 노동 계층 출신 친구들이 몇몇 편집국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미 언론사 편집국은 엘리트 대학 출신이 지배한다. 2018년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편집국에 대한 조사에선 기자의 절반 이상이 미국 최상위 29개 대학 출신이었다.

미국에서 동부 명문사학인 아이비리그 8개 대학과 스탠퍼드ㆍMITㆍ듀크ㆍ시카고 대를 포함한 이른바 ‘아이비 플러스’ 12개 대학 출신은 미국 대졸자의 0.8%에 불과하다(미국에는 근 4000개의 4년제 유니버시티와 칼리지가 있다.)

이들 수퍼 엘리트대 출신에게 일자리 시장은 마치 여러 갈래로 펼쳐지는 ‘촛대’와 같다. 이들은 거의 모든 직종에 진출해 리더십 지위를 차지한다. 이들은 최고의 직업을 독점하고, 자신들과 같은 최고의 기술 보유자에게 필요한 기술을 개발한다. 최고의 일자리는 더욱 나아지고, 나머지 일자리는 갈수록 나빠진다.

◇바이든, 미 경제의 71% 차지하는 500개 카운티에서 승리

브룩스가 일컫는 ‘우리’는 샌프란스시스코ㆍ워싱턴 DCㆍ오스틴과 같은 몇몇 경제 활황 도시에서 나머지 계층과는 ‘분리’돼서 산다. 바이든은 2020년 미 대선에서 고작 500개 남짓한 카운티에서 승리하고도, 2500개가 넘는 카운티에서 이긴 트럼프를 눌렀다. 바이든이 이긴 카운티는 미국 경제의 71%를 차지하고, 트럼프 카운티의 미 경제 기여도는 29%에 불과했다.

미국 사회의 이런 특권층(‘우리’)은 점점 고립돼서, 서로 같은 단어를 쓰고 비슷한 고수익 전문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만 알아보고 교류한다. 이들이 선호하는 자유무역 정책은 이들이 구매할 상품의 가격을 낮추지만, 이들의 일자리가 중국으로 이전될 가능성은 낮다. 이민자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은 서비스 직종의 임금을 낮춘다. 유입된 저(低)교육 이민자들이 기득권층의 임금에 하향 압박을 가할 일도 없다.

◇반트럼프주의 기득권층이 바꿔버린 문화ㆍ사회규범

‘우리’는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언어와 관습을 채택했다. 정확히 문제 원인을 짚지 않고 애매하게 ‘문제가 있어 보인다(problematic)’는 류의 표현이나 시스젠더(cisgenderㆍ선천적인 성과 본인의 성 정체성이 일치하는 경우)’, 히스패닉ㆍ라티노라는 말 대신에 양성(兩性) 개념인 라틴엑스(Latinx)와 같은 단어를 쓰면 ‘우리’에 속한다.

반대로,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은 이제 언어와 행동에서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가 관용적인 룰을 바꾼 것을 모르기 때문에, 5년 전에나 허용됐을 법한 말들을 사용했다가는 해고될 수있다.

브룩스는 미 기득권 세력이 바꾼 사회적 규범의 예로 미혼 여성의 출산을 들었다. 과거엔 이런 현상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 문화를 지배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남을 판단하는 것처럼 보이는 규범을 점차 없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미국의 기득권 계층은 여전히 결혼해서 애를 낳는다. 대졸 여성이 미혼 상태에서 출산하는 경우는 10%에 불과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교 졸업장만 있는 여성이 낳는 아이의 60%는 미혼 상태에서 출생한다. 사회적 규범은 바뀌었지만, 미혼 여성에게 아기는 그 여성의 사회적 상승을 막는 가장 중요한 예측 인자가 됐다.

브룩스는 “우리는 결코 사악하지 않으며 대부분은 친절하고 공익을 생각하지만, 우리가 당연시하고 혜택을 받는 체제는 다른 이에게 압제적이 됐다”고 진단했다.

◇”트럼프는 노동계층 위협하는 고소득 전문직종 겨냥”

브룩스는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왜 덜 교육 받은 이들이 경제ㆍ정치ㆍ문화ㆍ도덕적 공격을 받는다고 결론 내리는지, 그들이 왜 트럼프를 자신들의 최고 전사(戰士)로 삼아 고등교육을 받은 계층에 저항하는지 이해하기 쉽다”고 밝혔다.

작년 11월15일 트럼프 전 대통령이 플로리다주 팜 비치에 있는 자신의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미 대선 재도전 의사를 밝히자, 지지자들이 "MAGA 킹" "트럼프 영원히" 등의 구호를 외치며 환영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트럼프는 미국 노동계층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기업인이 아니라 바로 고소득 전문직종 종사자들이라는 것, 대중이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가 지배하는 인식 체계를 거부할 강력한 리더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트럼프가 기소된다고 해서, 지지자들이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지난 6개월간의 여론 조사가 보여주듯이, 바로 전문직종 종사자들이 트럼프 지지자들로 하여금 더욱 뭉치게 만들었다.

◇트럼프주의 막으려면, 미 기득권이 ‘행동’ 멈춰야

브룩스는 트럼프에 대한 기소를 그 지지자들이 주장하듯이 ‘정치적 마녀 사냥’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는 “나는 미국 사법체계를 믿고, 트럼프는 분명히 괴물이고, 교도소에 가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미 기득권 세력에게 ‘더 큰 사회적 맥락’을 볼 것을 주문했다. 미국의 사회학자 E 딕비 발트젤(1996년 사망)의 말을 인용해 “역사는 리더십 보다는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을 더 선호했던 계층들의 무덤으로 가득 차 있다”며 이게 현재 미국의 반(反)트럼프 기득권 세력이 노닥거리고 있는 ‘운명’이라고 경고했다.

브룩스는 “우리가 트럼프식 대중영합주의자들(populists)을 계속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진짜 중요한 문제는 이 트럼프주의가 필연적이 되게끔 한 우리의 행동을 우리가 언제 멈출 것이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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