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구, 시대·지역 넘어 ‘사람들의 꿈’을 더욱 빛내다
[서울&]
콜롬비아 원주민 ‘엘도라도 의식용’ 등
각 대륙의 생활 담은 장신구 ‘반짝반짝’
이강원 관장, ‘현지어 배우는 열정’으로
1978년부터 7500점 모아 400점 전시
에티오피아 마르카토 시장, 한 상인이 두르고 있던 은목걸이는 이강원 관장에게 운명의 나침반이었다. 콜롬비아 무이스카족의 ‘엘도라도 의식’을 상징하는 금으로 만든 작은 뗏목, 소말리아의 어떤 집안에서 결혼하는 딸에게 물려주던 엄마의 금목걸이. 그는 수십 년 동안 여러 나라 여러 지방을 다니며 사람들의 온기를 간직한 장신구를 모았다. 길을 잃었던 아프리카 산속의 그날 밤도, 내전의 총소리도 그에게 더 깊은 추억을 선물했을 뿐이었다. 세계장신구박물관에 가면 여러 나라 여러 지방 사람들의 온기와 이야기가 담겨 더 빛나는 장신구를 볼 수 있다.
금을 칠한 남자, 엘도라도. 그리고 왕의 뗏목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부족장 후계자의 몸에 금가루가 발라진다. 금칠한 후계자는 갈대를 엮어 만든 뗏목을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간다. 뗏목에 금으로 만든 여러 조형물과 장신구가 에메랄드와 함께 실려 있다. 금칠한 후계자는 의례에 따라 의식을 진행한다. 금으로 만든 조형물과 장신구, 에메랄드를 호수에 바치며 부족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다.
의식이 끝나면 후계자는 부족장이 된다. 부족장은 부족의 왕이었으며 왕이 되는 의식은 신성했다. 기원전부터 전해진 콜롬비아 무이스카족의 ‘엘도라도 의식’이다. ‘엘도라도 의식’은 과타비타 호수에서 열렸다. 엘도라도란 ‘금을 칠한 남자’를 말한다.
당시 금은 신과 인간을 잇는 매개물이었으며, 영생의 상징이었고, 부족을 지키는 성물이었다. 콜롬비아 안데스산맥의 험준한 산세에 십여 개 부족이 각각 고립되다시피 살았지만 공통된 문화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금 문화’였다. 금을 신성시하고 귀중하게 여겼으며 제련·합금·세공 기술도 뛰어났다. 금을 종이처럼 얇게 펴서 금박을 만들어 무늬를 새겼다.
세계장신구박물관에 가면 무이스카족의 ‘엘도라도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금으로 만든 ‘엘도라도 의식용 뗏목’을 볼 수 있다. 7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 높이 7㎝의 작은 금 뗏목 옆에는 에메랄드 원석과 가공품도 전시됐다.
16세기에 남아메리카를 침략한 스페인 사람들은 인디오들이 일군 ‘금 문화’를 보고 어딘가에 황금의 계곡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를 두고 ‘엘도라도’라 불렀다. 금은 그들에게 수탈의 대상이었다. 신성을 상징했던 ‘금을 칠한 남자, 엘도라도’가 황금에 눈먼 침략자들에 의해 ‘황금의 계곡, 엘도라도’라는 탐욕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에티오피아 마르카토 시장에서 꿈을 찾다
세계장신구박물관은 이강원 관장이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모은 전통 장신구부터 근현대의 장신구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7500여 점을 소장하며 그중 400~450점 정도를 전시한다. 이 관장은 1971년부터 2002년까지 외교관의 아내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았다.
1978년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는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이 이상할 정도로 치안이 불안했다며 옛이야기를 꺼낸 이 관장은 아디스아바바 마르카토 시장의 추억을 들려줬다.
시장 바닥은 온통 흙이었다. 마늘, 양파, 통밀 등 채소와 곡식을 파는 사람들, 재봉틀을 놓고 그들의 전통 의상인 샴마를 만들어 파는 상인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들이 모인 왁자지껄 장바닥에서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한 여성 상인이었다. 정확히 말해 그 여성 상인이 목에 두른 은목걸이였다. 은목걸이를 보는 순간 머리부터 마음까지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상인은 미화 100달러를 준다고 해도 팔지 않았다. 집안의 보물로 여기며 항상 목에 두르고 다니는 은목걸이는 그 상인에게 분신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뜻을 굽히지 않고 어렵게 은목걸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은목걸이에서 시작된 그의 장신구 사랑은 현지어 공부로 이어졌다. 에티오피아 부족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암하라 부족의 말을 배운 그는 현지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더 많은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동양의 작은 여인이 자기 나라, 자기 부족의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호의를 베풀었다. 당시 아프리카의 웬만한 골동품은 서양 수집가들이 가져간 뒤였으며, 남아 있는 것들도 서양 수집가들과 경쟁하며 구해야 했다. 그때 암하라어가 그에게 큰 도움이 됐다. 안목을 넓히기 위해 그 분야의 책을 구해 독학한 그의 노력도 한몫했다.
그렇게 케냐, 탄자니아까지 수집 영역을 넓혔다. 세계 여러 나라, 여러 지역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가 담긴, 사람의 온기가 깃든 장신구를 한자리에 모아 박물관을 열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2004년 세계장신구박물관을 열며 꿈을 펼치다
1982년 미국 워싱턴에 살 때에도 그의 발길은 자연스레 시장으로 향했다. 골동품 시장에서 유럽과 미국의 근대 장신구를 접할 수 있었다.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자연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그 감동은 장인을 탄생시키며, 장인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작품이 유물이 된다는 생각은 코스타리카에서 지낼 때 가지게 됐다. 이때 인디오의 ‘금 문화’ ‘은 문화’에 눈뜨게 됐고 페루와 콜롬비아까지 장신구 수집의 발을 넓혔다. 그렇게 만난 유물 중 하나가 콜롬비아 무이스카족의 ‘엘도라도 의식’용 뗏목이었다. 마지막 거주지였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추억은 산텔모 시장의 유럽 골동품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2004년, 세계장신구박물관의 문을 열었다. 에티오피아 마르카토 시장 한 상인의 목에 걸려 있던 은목걸이가 선물한 그의 꿈이 26년 만에 실현된 것이다.
세계장신구박물관은 1층부터 3층까지 전시실이다. 3층은 ‘명화와 장신구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꾸며졌다. 유명한 그림 속에 등장하는 장신구를 톺아보며 그림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배웠다.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1571~1610)의 그림 ‘엠메오에서의 저녁식사’에 조개껍데기 장신구가 나오는데, 조개껍데기는 중세부터 순례자의 상징이었단다. 지금도 산티아고 순례길 순례를 상징한다는 문구도 덧붙였다.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의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머리에 두른 터번의 파란색은 당시 금보다 비싼 보석 라피스 라줄리를 갈아서 기름과 섞어 색을 낸 것이라고 한다.
20세기 초 우리나라 비녀와 가락지도 전시됐다. 칠보, 산호 등으로 장식한 은비녀의 끝부분에 삿된 기운을 물리치고 장수를 기원하는 뜻이 담겼다고 한다.
19~20세기 초 장신구가 나무줄기를 상징하는 여러 쇠기둥에 설치돼 부분조명으로 분위기를 만든 공간 ‘장신구의 숲’, 20세기 초 콩고, 멕시코, 말리, 앙골라, 나이지리아, 코트디부아르 등 여러 나라의 마스크로 꾸민 ‘마스크 벽’, 여러 보석으로 꾸민 1930년대 프랑스 시계, 팔찌, 반지 등과 1880년대 영국의 장신구, 1960년 스위스 다이아몬드 금시계, 1950년 인도의 에메랄드, 루비, 다이아몬드 귀걸이, 1830년 영국의 금 자수정 팔찌, 19세기 스리랑카의 금, 루비, 다이아몬드, 진주가 박힌 머리핀 등은 2층에서 볼 수 있다.
1층 전시실 중 ‘십자가의 방’에는 13~19세기 에티오피아의 십자가 펜던트를 모아 놓았다. 42㎝ 크기의 십자가는 19세기에 은으로 만든 것으로, 11개의 암굴교회가 있었던 에티오피아 랄리벨라 지방에서 종교의식에 쓰였던 것이라고 한다. 나무의 진이 땅에 묻혀 굳어진 광물인 호박은 지질시대에 만들어졌다. 소말리아에서 19세기에 만들어진 금목걸이는 딸이 결혼할 때 엄마가 물려주던 것이다.
-------------------------------------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5시 휴관일: 없음 관람요금: 5천~1만원 사전예약제 운영: 세계장신구박물관 누리집에서 예약 문의 전화: 02-730-1610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한겨레 금요 섹션 서울앤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