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엄마 사이에서 자랄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플랫]
혹시 혁명이라는 게 일어나고 있다면 나는 겨우 뒷줄에서 까치발을 든 사람일 것 같다. ‘이상하고 뛰어난 친구들아, 이번엔 또 뭘 해낸 거니?’ 선구자가 쳐놓은 사고와 이뤄놓은 업적을 종종대며 따라가는 동안 혁명의 끄트머리에서 내 삶도 변해간다.
오랜 동지 규진의 임신 소식을 듣던 밤 나는 문득 더 강하고 웃긴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규진이 이미 그런 엄마이긴 하지만 양육이 엄마들만의 책임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엄마 친구로서의 나, 시민으로서의 나, 출산과 육아가 남일이 아니게 된 작가로서의 나를 상상하면 저항과 사랑을 위한 체력뿐 아니라 고도의 유머 감각까지 필요할 터였다.
아직도 동성혼이 법제화되지 않은 이 나라에서 레즈비언 부부인 규진과 세연은 세금을 ‘따박따박’ 내며 살아간다. 이달 초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규진의 임신 소식을 발표하자 축하뿐 아니라 무수한 악플도 달렸다. 진심 어린 걱정인지, 교묘한 비난인지 헷갈리는 댓글도 있었다. 아이가 차별받을까봐 걱정된다는 반응이 그중 하나다. 규진의 아내 세연은 “정말 저희 아이를 걱정하시는 거라면 같이 세상을 바꿔나가는 데 도움을 주시면 될 것 같다”고 차분히 대답했다. 힘껏 응원하는 이는 팔짱 끼고 훈수 두지 않는다. 기후재난이 빈번하고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허가되고 사람들이 일하다 죽고 괴로워서 죽는 이 나라에서도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친구가 있다면, 무모하고도 용감한 그를 위해 궁리하고 싶을 따름이다. 나는 어떻게 힘을 보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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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커플의 아이 위한 간담회
지난 7월22일엔 규진과 세연 부부의 베이비샤워가 열렸다. 지인들이 모여 곧 태어날 아이와 양육자를 축복하는 행사였다. 행사의 제목은 기막히게도 ‘대한민국 저출생대책 간담회’였다. 4년 전 이들이 결혼 소식을 알렸을 때 일부 시민들은 동성애자들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고 출생률이 떨어진다며 탄식했다. 그런데 오늘날 바로 그 부부가 출생률에 기여를 해버린 것이다. 물론 국가에 이바지하기 위해 결심한 임신은 아니지만 말이다. 진행을 맡은 발군의 사회자 금개는 ‘인권 그 자체인 규진 부부가 대한민국 사회를 놀리는 자리’라고 농담했다. 둘 중에서 왜 본인이 임신하기를 자처했냐는 금개의 질문에 임신 8개월 차인 규진은 “와이프 힘들까봐 그랬다”고 대답하며 특유의 멋을 지독하게 고수했다. 부부는 이날 축의금을 일절 받지 않았다. 동성애 혐오 댓글을 단 악플러들에게 받은 합의금으로 준비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혼과 육아의 궤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축의금의 굴레에 갇히지 않기를 바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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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장혜영 의원(정의당)이 준비한 간담회가 이어졌다. 대한민국 가족제도가 처한 현실에 관한 발제였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이미 존재하지만 그중 ‘법적 가족’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일부일 뿐이다. 이전까지 가족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자 싫어도 감당하며 살아야 하는 혈연중심적 울타리였으나, 이제는 내 의지대로 가족을 택해도 보장받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장 의원은 주장했다. 그런 고민 속에서 5월 말에 발의한 법이 ‘가족구성권 3법’이다. 혼인평등법과 비혼출산지원법과 생활동반자법이 포함되어있다. 국회에서도 누군가는 정상가족의 경계를 허물고 자신이 원하는 동반자와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위한 제도를 부단히 마련 중이다.
이어지는 축가에서는 민중가수 이랑이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을 불렀다. 이 험한 세상에 함부로 새 생명을 낳지 말라는 의미의 가사가 반복되는 명곡이다. 이쯤 되면 손님들은 충분히 알아챈다. 규진 부부가 지지하는 넓은 세계를 말이다. 이들은 동성 커플이 결혼하고 출산할 권리뿐 아니라, 결혼도 출산도 가족도 택하지 않을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담론장에도 힘을 보탠다.
‘새 생명을 이 세계에 데려오는 일’
마지막 순서는 아기의 성을 공개하는 ‘젠더리빌’이었다. 규진은 말했다. ‘젠더란 아이가 나중에 스스로 정체화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 아닌가 싶다’고. 그래서 이 의례의 집행자로 드렉퀸 세레나와 레즈비언 루신다를 초대했다. 젠더를 횡단하는 이들에게 젠더리빌을 맡김으로써 베이비샤워의 전형을 비튼 것이다. 두 사람이 공중에 매달린 피냐타 인형을 힘차게 두드리자 반짝이는 분홍색 종이들이 터져나왔다. 세레나가 외쳤다. “어머, 딸이야!” 사람들이 웃고 색종이가 벚꽃잎처럼 휘날리는 그 순간이 잠시 느리게 흘러갔다. 아이에게 다가올 혼란과 풍요가 어렴풋이 그려져서다. 그는 정말이지 다양한 모습의 이모와 고모와 삼촌들 속에서, 간단히 설명되지 않는 어수선한 어른들 사이에서 자라게 될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나 다양한 모양이라고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다. 너의 두 엄마가 혁명의 앞줄에서 무얼 해냈는지도 증언해주고 싶다.
▼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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