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작가의 유작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조용한 미국인
요즘 세상에 안정효와 그레이엄 그린을 둘 다 아는 사람은 꽤 적을 듯하다. 안정효는 마지막 작품의 해설에서 1954년을 회상하며 ‘당시에는 대한민국의 출판업이 열악하여 무슨 책이건 5백 부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라며 화제작이 되고는 했다’고 적었는데, 지금 한국의 독자 중 안정효와 그레이엄 그린을 둘 다 아는 사람이 5백 명이 될까 모르겠다. 다만 유명도와 중요도는 비례하지 않으니 둘 다 지면에 실릴 가치만은 충분하다.
그레이엄 그린은 20세기 영국 대표 소설가 중 하나다. 1904년에 태어나 199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권 가까운 소설을 썼고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올랐다. 그의 소설 대부분이 영화화됐으며 그중에서는 <제 3의 사나이> 같은 고전 명작 영화도 있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원작 소설 작가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시작한 존 르 카레에게 큰 영향을 준 작가이기도 하다. 한국에는 현대 영미 문학 소설가 중 미국 백인 소설가가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그린의 작품이 덜 알려진 경향이 있다.
<조용한 미국인>은 그레이엄 그린의 작품 중에서도 명작이다. 배경은 1952년부터 1955년까지의 베트남. 주인공은 영국인 특파원 파울러와 현지 여성 후엉, 소설의 제목이 되기도 한 미국인 파일이다. 소설은 세 사람 각자의 사정과 진심과 가식 사이로 시대와 정치와 음모가 루미큐브처럼 얽혀 있다. 이 책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레이엄 그린은 이 책을 쓰고 미국 입국을 거부당했고 훗날 일어난 베트남전쟁을 예견했다는 평도 받았다.
그린의 책을 처음 읽으면 조금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챕터에 따라 현재와 회상이 뒤섞인다. 등장인물의 대사는 실질적인 듯 상징적이며, 사실과 진실은 어둠 속의 인기척처럼 보일 듯 말 듯하다가 마지막쯤 그 면모를 드러내지만, 그건 풍선 터지는 듯한 충격파가 아니다. 번역가 안정효는 이를 두고 ‘줄거리는 구조일 따름이고, 그 구조 속에서 작가가 탐구하는 주제의 깊이는 피상적으로 흐르는 이야기 밑에서 묵묵히 저류의 힘을 발휘한다’고 표현했다.
구조 속에서 작가가 탐구하는 주제의 깊이는 인간의 미묘한 다면성이다. 삶은 ‘지대넓얕’과 ‘알쓸신잡’ 식으로 요약될 수 없고, 누구에게나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회색의 마음이 있다. 그린은 <조용한 미국인>에서 바로 그 회색 마음을 집요하게 그린다. 미국인과 베트남인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정체성과 베트남의 상황, 이를 바라보고 묘사하는 영국인이 보여주는 영국의 미묘한 우울감을 그릴 수 있는 건 문학뿐이다. 영화나 음악으로만 구현하는 쾌감이 있듯.
번역가 안정효는 영한 번역가 1세대다. 20대부터 영어로 소설을 썼고, 베트남전에 참전해 <하얀 전쟁>을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펴냈고, 총 1백28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영미권 문학에 이해도가 깊은 동시에 베트남전쟁을 겪은 한국인 번역가의 작품이니 <조용한 미국인>의 한국어 번역 수준 역시 무척 높다. 각주와 해설에도 그의 풍부한 경험과 세계관이 들어 있다. 이 책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2023년 7월 안정효의 부고가 보도됐다. 고인의 마지막 작품이 <조용한 미국인>이 되었다.
진흙 속의 호랑이
<조용한 미국인>의 주제 때문에 최근 출간된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서적을 모았다. <진흙 속의 호랑이>는 상대 탱크를 1백50대 이상 격파한 독일군 기갑장교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이다. 이런 책은 전쟁 옹호와 거리가 멀다. 그는 지휘관이 아닌 실행가였기 때문에 오히려 아주 실무적인 태도로 세계와 전쟁을 대한다. ‘주적은 정치가들이 결정하고 군인은 그 결정에 따를 뿐이다’라는 말에서는 직장인의 피로마저 느껴진다. 상세한 묘사와 정확한 정보 덕에 페이지가 탱크처럼 넘어간다.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매슈 B. 리지웨이는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해 더글러스 맥아더의 후임으로 유엔군사령관직에 올라 유엔군을 지휘했다. 전쟁을 실제로 겪고 지휘한 미국 장군의 경험담답게 감정적인 서술 대신 실질적인 정보와 경험이 담겼다. 미국 엘리트가 전쟁을 겪은 시점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재미와 의미가 있다. 가장 놀라운 건 모 서점 사이트에서 이 책을 구입한 20대 여성이 6.8%라는 점이었다(20대 남자는 0%). 요즘 20대 여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Editor : 박찬용 | Photography : 박원태
Copyright © 아레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