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 [K콘텐츠의 순간들]

복길 2023. 8. 3.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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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억9천: 결혼전쟁〉은 시청자들에게 이중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와 ‘이래도 결혼할래?’가 뒤엉킨다. 한국의 결혼 적령기 청년이 겪고 있는 혼란과 매우 유사하다.
tvN <2억9천: 결혼전쟁>은 예비부부 열 쌍이 상금(결혼 자금, 2억9000만원)을 두고 경쟁하는 서바이벌 예능이다. ⓒtvN 화면 갈무리

고등학교를 관두고 오락실에서 시간을 축내고 있던 나에게 엄마는 작심한 듯 말했다. “그래도 ‘중졸’로 살면 안 된다.” 엄마는 나의 이른 낙오를 결코 인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매일 ‘우리 아이 검정고시로 명문대 보내기’ 같은 수기를 탐독하며 나를 기어코 ‘정상인’의 길로 인도하려 했다. 독립할 자원이 없는 청소년은 응당 미래를 담보로 부모와 거래해야 하는 법. 그때의 나는 스스로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의지도 없었으나, 딸의 인생을 정상궤도로 돌려놓기 위한 엄마의 우주적 노력에 간간이 응답할 효심은 있었다. 그렇게 나는 무심코 ‘고졸’이 되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얼른 안락한 불효녀의 자리로 돌아가야지! 그러자 엄마는 잽싸게 나를 붙잡고 다음 거래를 종용했다.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그래도 졸업은 해야지” “그래도 취직은 해야지” 그리고 결국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20년 가까이 엄마의 ‘그래도 무공’에 전혀 타격을 입지 않던 나, 보스 몬스터는 결국 ‘결혼’이란 예상치 못한 일격에 큰 손상을 입고 ‘평범 몬스터’로 전락했다. 나, 평범 몬스터는 울면서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위력을 잃어도 명색이 몬스터인데 결혼이 웬 말이냐고.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반격을 했다. “엄마! 돈이 없는데 어떻게 결혼을 해!” 그러자 엄마가 휘청거렸다. 몬스터는 사실 알고 있었다. ‘남들 하는 건 다 하고 살아야 한다’며 공격을 퍼붓는 전사들은 대부분 ‘가난한 결혼’ 앞에서 용기를 잃고 겁쟁이가 된다는 것을.

〈2억9천: 결혼전쟁〉이란 제목을 보는데 한숨이 먼저 나온다. 또 어떤 위기의 부부가 자신의 전쟁 같은 결혼 생활을 만천하에 공개하려는 것일까. ‘2억9000만원’이라는 금액은 부부가 갈라서며 다퉈야 할 몫이려나…. 〈오은영 리포트-결혼지옥〉 〈당신의 결혼은 안녕하십니까〉 〈결혼과 이혼 사이〉 〈결혼 말고 동거〉 〈애로부부〉 〈고딩엄빠〉까지. ‘잉꼬부부’의 금슬엔 진정성과 흥행 요소가 부족하다는 것이 밝혀지자 TV쇼는 이제 결혼을 전쟁이라 정의하고 그 참상을 집요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체 왜 이런 스트레스를 주는 거냐고 사람들이 절규하면 그들은 ‘전술과 협상을 알려주기 위함’이라 둘러댔다. 그 덕분에 나는 잘 모르는 부부의 스트레스에 너무 많이 노출되었고, 결국 결혼이란 세상에서 가장 불온한 행위임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부부·결혼·이혼 리얼리티들이 내게 남긴 트라우마를 방패 삼아 〈2억9천: 결혼전쟁〉 1화를 재생했다. 파국을 맞은 부부의 냉랭한 기운이 이쯤에서 느껴져야 하는데… 없다. 소리 지르는 남편, 오열하는 아내, 상처만 점점 늘어나는 대화가 있어야 할 자리엔 풋풋한 긴장감, 행복한 웃음소리 같은 이질적인 것들이 있다. 나는 방패를 내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기척을 살폈다. 남녀 스무 명이 있었고 그들의 정체는 바로 ‘예비부부’였다. 그렇다. 이 쇼의 제목이 가리키는 ‘결혼전쟁’은 ‘결혼(을 하기 위한) 전쟁’ 이었던 것이다. 나의 트라우마는 더 커다란 충격으로 상쇄되고 말았다. 모두가 결혼이란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기 바쁜데, 여기 이 ‘예비’ 전사들은 결혼을 쟁취할 영광이라 여기고 전쟁터에 자원한 것이다.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한껏 상기된 예비부부 열 쌍은 마치 직접 겪어보진 않았지만 전쟁을 떠올리기만 해도 흥분하는 ‘밀덕(밀리터리 오타쿠)’을 연상케 했다.

총성 없는 결혼(을 하기 위한) 전쟁

7월 초 방영을 시작한 tvN의 새로운 예능 〈2억9천: 결혼전쟁〉은 가까운 미래에 결혼을 계획 중인 예비부부 열 쌍이 최종 우승 상금 2억9000만원을 두고 달리기, 참호 격투, 퍼즐, 심리 게임 등을 펼치는 ‘커플 〈오징어 게임〉’이다. ‘2억9000만원’이라는 상금은 지난해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2년 이내 결혼한 신혼부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대한민국 평균 결혼비용 보고서’에 근거한 것인데 주택·예단·예물·예식·혼수 자금이 모두 포함된 금액이라고 한다. 결혼 제도의 가치를 한껏 긍정하는 것 같은 이 쇼의 제작진은 높아지는 청년 미혼율의 원인을 ‘돈이 없어서’로 보았고, 그리하여 국내 최초 ‘결혼 준비 서바이벌’을 론칭한 것이다.

위의 문단을 아무리 다시 읽어봤자 어차피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이게 다 무슨 난리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썼기 때문이다. 쇼를 보면서 더욱더 확신했다. 내 글 안에서 이 쇼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기획자의 의도대로라면 아무도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시대에 결혼하겠다고 모인 기특한 예비부부에게 즐거운 경험과 포상을 선사해야 마땅한데 쇼는 다짜고짜 시련부터 안긴다. 열 쌍 예비부부는 영문도 모르고 갯벌을 질주해서 화병에 부케를 꽂아야 한다. 선착순 일곱 팀 안에 들지 못하면 숙소에도 입성하지 못하고 바로 탈락한다. 턱시도와 웨딩드레스가 진흙으로 더러워질수록 만면했던 설렘과 웃음기도 사라진다.

‘이게 다 결혼이랑 무슨 상관이지?’ 같은 질문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지라도 꾹 찍어 눌러라. 이 쇼는 의미를 찾아 연결하기 시작하면 힘들어진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천진한 예비부부에게 결혼은 진흙탕임을 예고하는 간단한 메타포일 뿐이다. 기이하게 편곡한 결혼행진곡이 반복되는 것도, 아무리 봐도 감옥일 뿐인 10개의 숙소도 마찬가지다. ‘아, 혼수 자금을 건 커플 체육대회 같은 거구나!’ 이런 감상도 머릿속에 봉인하라.

쇼는 떨어진 세 커플을 모아 법원에서 쓰는 거짓말 탐지기를 채우고, 연인 간에 신뢰를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아 그렇다면 서로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부부가 살아남는 진정성 서바이벌이구나!’ 아니! 아니다. 탐지기의 결과와 관계없이 이들의 당락은 다른 커플들의 투표로만 결정되기 때문이다. 거짓말 탐지기에서 가장 강한 신뢰를 보인 커플은 그 존재 자체로 다른 커플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떨어지고 만다. 그럼 ‘거짓말 탐지’를 왜 한 거지? 혹시 이 쇼는 온갖 방식을 동원해 결혼이라는 지옥의 탄생을 막으려는 비혼 장려 서바이벌인가? 아니면 관혼상제마저 서바이벌로 만들 수 있다는 방송인들의 직업적 오기일까?

〈2억9천: 결혼전쟁〉은 결혼이라는 봉건적 가치를 서바이벌이라는 포맷과 결합하면서 의도치 않게 쇼 전체를 결혼 제도에 대한 일종의 저항처럼 보이게 만든다. 쇼 전반에 깔려 있는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와 ‘이래도 결혼할래?’라는 이중적 메시지는 한국 사회의 ‘결혼 적령기’ 청년들이 겪고 있는 혼란과도 매우 유사하다. 쇼가 반영한 사회적 문맥을 극화하자면 이런 식이 되지 않을까. 청년들아, 제발 결혼해라! 단, 준비된 인간들만!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흠…. 조금의 지원을 해주겠다. 반드시 열 배로 갚아라. 왜 결혼을 하려 하느냐! 결혼은 지옥이다! 그러나, 그래도… 결혼을 해라! 단, 자격이 있는 인간들에 한해서만! 자격이 없다면? 그것이 너의 팔자이니 평생 혼자 살아라!

결혼을 장려하는 건지, 비혼을 장려하는 건지 헷갈리는 결혼 서바이벌 사회에서, 나는 또 무안한 표정의 시청자가 된다. 제도를 기피하는 원인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것을 다시 제도 속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하니 전쟁은 끝이 없고 곡소리와 비명은 무한 루프로 이어진다. 누가 최종 우승을 할지 전혀 관심이 없는 나는 귀를 막고 중얼거린다. 결혼할 자격을 넓혀달라. 결혼이 시험이나 자격이 되지 않게 해달라. 시험이 싫어 학교도 때려치운 내가 결혼이란 ‘정상성’ 시험에 응시할 리 없지 않은가.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모두가 2억9000만원어치의 행복을 누리게 해달라. 내가 너무 사회에 ‘해달라’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상관없다. 사회도 전쟁을 멈출 생각 없이, 오직 참전하지 않는 내 탓만 하고 있기 때문에.

복길 (자유기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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