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철·농약철 놓치면 안 돼"... 그러다 폭염에 쓰러지는 농촌 어르신들

최다원 2023. 8. 3. 04:0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평생 밭일을 했지만 갈수록 더워져. 나이는 먹어가지, 요 몇 년 새 밭 면적을 절반으로 줄이고 비닐하우스도 걷어버렸어."

전북 고창에서 남편과 단둘이 6만6,115㎡(2만 평) 규모의 밭을 관리하고 있는 한모(63)씨는 "온열질환에 대비할 거라곤 모자가 전부"라며 "3년 전 이맘때 고추 따러 가다가 땀이 미친 듯이 쏟아져 며칠간 입원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기록적 폭염에 노인 온열질환자 속출
냉방용품도, 일꾼도 없어 직접 일터로
"인력난 개선 시급해... 공공지원 필요"
2일 폭염경보가 발령된 경기 여주시 흥천면의 가지밭에서 농부 김학남씨가 더위를 피해 이른 아침부터 수확 작업을 하던 중 땀을 닦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평생 밭일을 했지만 갈수록 더워져. 나이는 먹어가지, 요 몇 년 새 밭 면적을 절반으로 줄이고 비닐하우스도 걷어버렸어.”

8월 첫날 전국에서 가장 더웠던(38.4도) 경기 여주시. 폭염경보가 이어진 2일에도 여주 흥천면에서 가지농사를 짓는 김학남(65)씨는 오전 7시부터 수레를 끌며 웃자란 이파리를 솎아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뙤약볕에 등이 흠뻑 젖은 지는 오래. 아침나절에만 500㎖짜리 생수 서너 통을 들이켰다. 김씨는 “가지는 기계를 쓸 수 없는 농작물이라 아무리 더워도 허리를 굽혀 일해야 한다”며 “내년 여름은 얼마나 더울지 벌써부터 걱정”이라고 한숨 쉬었다.

수마가 할퀴고 간 농촌에 곧장 폭염이 상륙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5월 20일부터 이달 1일까지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 추정 사망자(23명) 중 73.9%(17명)가 논밭에서 발견된 70~90대였다. 대개 면역력이 떨어져 탈수와 열 자극에 취약한 노인들이 야외활동을 하다 의식을 잃은 경우였다. 인명피해가 가장 많았던 경북도는 마을방송 등으로 낮 시간 나 홀로 농작업을 피하도록 홍보하고, 전북도는 ‘온열질환 감시체계’를 가동하는 등 각 지방자치단체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일년 농사 망칠라... 무더위 불사하고 논밭행

2일 경기 여주시 흥천면의 가지밭에서 농부 김학남씨가 이른 아침부터 수확 작업을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하지만 정작 농촌 노인들은 지자체의 외출 자제 권고에 심드렁한 반응이다. 직전 폭우로 병충해 위험이 커진 데다, 하루라도 쉬면 수확 적기를 놓쳐 도통 일손을 놓을 수 없다. 이날 오전에만 20㎏짜리 콘테나 박스(직사각형 플라스틱 용기) 세 개를 가지로 채운 김씨는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면 학교나 공장 납품량이 줄어 바짝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 양평에서 25년째 농사를 짓는 이한무(82)씨도 “비가 많이 내린 뒤에는 탄저병이 생기기 십상이라 부지런히 약을 쳐야 한다”고 했다.

사정은 알겠지만, 그늘 한 점 없는 허허벌판에서 노인들을 보호하는 냉방용품은 기껏해야 얼음물 몇 병뿐이다. 게다가 벌레와 풀독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긴 옷을 입고 양손에 농기구까지 들고 있으면 부채 하나 주머니에 넣기도 번거롭다. 전북 고창에서 남편과 단둘이 6만6,115㎡(2만 평) 규모의 밭을 관리하고 있는 한모(63)씨는 “온열질환에 대비할 거라곤 모자가 전부”라며 “3년 전 이맘때 고추 따러 가다가 땀이 미친 듯이 쏟아져 며칠간 입원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일꾼 어디 없소... "혹서기 농촌 일손 확대를"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경보가 내려진 2일 오후 경기 수원시 권선구 수도권기상청에서 예보관이 기온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고 남의 손을 빌리기가 쉬운 것도 아니다. 농촌 일손을 책임지고 있는 외국인노동자 품삯은 이미 오를 대로 올랐는데, 그마저도 혹서기엔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김씨는 “2,644㎡(800평) 밭을 매일 관리하려면 적어도 일꾼 3명은 써야 하는데, 일당 15만 원씩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면서 “여름 ‘농활’ 온 대학생들에게 이따금 도움받는 게 고작”이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씨 역시 “비료 뿌리는 날에만 올해 처음 캄보디아 노동자 1명을 딱 하루 고용했다”고 했다.

농촌 노인들의 건강권을 보호하고, 생산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면 결국 농촌사회의 ‘인력난’ 해소가 가장 빠른 해법이다. 대표적으로 ‘공공형 계절근로제’ 확대가 대안으로 꼽힌다. 정부와 지역농협이 힘을 합쳐 농협 측이 노동자를 직접 고용해 농가에 파견하는 사업으로, 고령ㆍ영세농이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단기 인력을 조달하는 장점이 있다. 이근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은 “논밭에 그늘막만 설치해선 안 되고, 노인 일감을 더는 게 핵심”이라며 “현재 전국 19개 지역에서 시행 중인 공공근로제를 적극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서현정 기자 hyunjung@hankookilbo.com
이서현 기자 here@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