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가곡 ‘비목’ 평설
무명용사의 애환 녹여내
권상인 ㈔부산문화유산연구회 이사장·예술학박사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탁월한 전략가 맥아더는 그해 7월부터 후퇴를 거듭하면서 부산을 중심으로 낙동강 교두보를 최후의 보루로 계획했다. 9월 초까지 인민군 13개 사단 12만 명이 왜관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포항, 남쪽으로는 함안 일대까지 포진해 있었다.
8월 말부터 미국의 B29 폭격기 100여 대가 일본의 후쿠오카와 오사카공항에서 날아와 매일 100t의 폭탄을 투하하는 융단폭격을 감행했다. 인천상륙작전은 9월 15일 시작됐으며, 9월 28일까지 낙동강 교두보 전역에 포진돼 있던 10만여 명의 인민군 중 2만5000여 명만이 살아남아 3·8선을 넘어 북으로 돌아갔다. 10월 7일 정오 유엔군은 3·8선을 넘어서 진격했으나 국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이보다 앞서 북으로 진군했다.
6·25가 일어난 그해 6월부터 중국 공산당 정부는 이미 만주 지역의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에서 한국전쟁에 파견할 의용군을 선발해 훈련시켰는데 1순위 선발 대상은 조선족 청년들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에 진격했을 때 훈련된 중공군 병력 60만 명이 이미 북한 산악지역에 은밀히 포진돼 있었고 중공군 사령관은 산악지역 작전에 능한 임표(林彪)였다. 임표는 북진하는 유엔군을 방어하기 위해 평안북도 청천강 일대에 중공군 18만 명,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에는 12만 명을 배치하고 유엔군 병력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부전선의 미 8군, 동부전선의 미 10군단 병력이 영하 15℃ 혹한의 전투에서 밤이면 피리와 꽹과리를 연주하는 중공군에게 북한 산악지역에서 고전하다 붕괴했다.
1951년 봄부터 정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유엔군과 중공군은 한 평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3·8선 일대에서 맹렬한 전투를 했는데, 모든 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곳은 한반도의 중앙부 평강을 정점으로 한 철원과 김화를 저변으로 하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였다. 피의 능선, 저격의 능선, 백마고지, 팔백 고지로 불리는 곳에서 빼앗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고, 5월 한 달 동안 중공군의 사망자가 1만6000명을 넘었다. 휴전이 된 1953년 7월 27일까지 철의 삼각지 일대에서 죽어간 중공군의 숫자는 1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끝내 철의 삼각지는 휴전협정으로 남북으로 2등분 되었다.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간 후, 1964년 ROTC 2기 출신 ‘비목’의 작사자 한명희 보병 소위가 유엔군과 중공군이 2년간 대치하며 수많은 사상자를 낸 이 지역의 비무장지대(DMZ)에 7월 초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장마가 개인 어느 날 순찰 중 양지바른 곳 이끼 낀 돌무더기 사이에 옹이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 썩은 나뭇등걸 하나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지대는 민간인이 접근할 수 없고 군 초소 이외에는 어떤 시설도 설치할 수 없었으므로 휴전이 된 날로부터 모든 것이 정지된 공간이었다.
필자가 1998년 경성대학 재직 시 만주 장춘에 있는 ‘길림예술대학’을 교류 차원에서 방문했을 때 환영의 뜻으로 음악회가 열렸다. 당시 그 대학 성악과 교수였던 테너가 우리의 가곡 ‘비목’을 불렀는데 ‘…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이 대목에서 그만 격정적인 슬픔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고 말았다. 민망했던 길림예술대학의 서열 1위인 공산당 서기가 그 사연을 설명해 주었다.
그 테너의 삼촌이 6·25 당시 중국 의용군으로 한국전에 참가했으나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는 얘기였다. 그때 필자는 7사단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한 한명희 소위의 시 ‘비목’을 연상하면서 이끼 낀 돌무덤의 주인이 바로 이 테너의 삼촌은 아닐까? 상상해 보았다. 그 무덤의 임자가 국군이었다면 휴전 후, 국군 지역이었으니 군번 등 인적 사항을 조사해 동작동 국군묘지에 안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목’은 중공군의 무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목’ 가사 가운데 ‘먼 고향 초동친구’에서 초동은 초동(樵童)을 뜻한다. 즉 꼴 베는 어린이를 말한다. 농촌에서는 초등학생 또래 어린이들이 한여름엔 꼴망태를 메고 3~4명이 무리 지어 산록에 나가 돼지와 소에게 먹일 풀을 베었다. 그 초동들이 풀을 베는 낫은 조금 작았으므로 접낫이라고 불렀다.
2절의 궁노루는 본래 뿔 갈이 하는 계절에 뿔이 빠져버린 노루나, 노루처럼 생겼지만 애초에 뿔이 없는 고라니를 궁노루라 부른다. 이 고라니는 한겨울인 1월경이 번식기로, 이때 수컷이 암컷을 부르는 울음소리는 고음의 짧은 외마디소리인데 전선의 조용한 달밤이면 먼 산에 부딪혀 메아리로 들릴 때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자료에는 궁노루란 사향노루를 말한다고 했는데 사향노루는 중국 운남성 사천성 티베트 등 위도 25~30도 사이의 지역에서만 서식하니 우리 삼천리강산에는 없는 짐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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