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민일보가 만난 사람] 6. 이동석 ㈜석전자·㈜마레몬스 회장
화천 출생 어려운 가정형편에 10대에 상경
“종업원이라도 내 일처럼, 나를 만든 원동력”
1986년 창업 20년만에 수십채 점포주로 성장
좌절의 시간 견뎌 청년 벤처기업 대부 우뚝
성공 비결 ‘과감한 투자’ 도중 실패 거액 손실
유망 청년기업 투자, 수익 배분해 사업 키워
속초 호텔마레몬스 등 10여곳 500억원 투자
입지전적 사업가, 남다른 기부와 애향심
한일합작영화·고려대 발전기금 등 쾌척
고향사랑기부제 최고액 선뜻 전달하기도
교육재단·사회복지법인 설립 등 계획
1970~80년대 가전제품이 대중화되지 못한 시기에 ‘없는 것이 없고, 못 만드는 것이 없는 전자기기의 성지’로 널리 알려진 명소가 있었다. 다름 아닌 서울 종묘입구에서 청계천·을지로 일대에 형성된 세운상가가 그곳이다.당시 점포 마다 2~3평 공간에 빼곡히 들어선 수백여개 전자부품가게는 전국 각지에서 풍운의 꿈을 품고 상경한 전기·전자 기술제작자로 북적였다.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수많은 젊은이들도 세운상가의 화려한 전성기를 이끈 주역이다.
이동석(68) 석전자 회장도 세운상가의 신화를 쓴 성공한 기업가로 빼놓을 수 없다. 20대 세운상가 종업원에서 시작해 이제는 다양한 분야의 청년 창업기업을 육성하는 벤처캐피털 회장으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사업가이다.
그는 화천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형편상 10대부터 춘천에서 전자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20대로 접어들기도 전에 매형의 권유로 세운상가에 진출, 조그만 전자부품 점포의 종업원에 취업한 ‘청년 이동석’은 본격적으로 제2의 인생을 맞이하게 됐다.그 시기가 1972년 무렵이다. 우리나라 경제가 산업화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때이다.
이 회장은 20대 초반에 불과한 종업원이었지만 밤새워 기술을 익혔다. 소형라디오 제조기술을 배우기 위해 경쟁업체 직원과 친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컸다. 단순히 ‘세운상가의 기술자’로 남고 싶지 않았다. 사업가의 야망을 품고 다양한 거래처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배우며 경영수업을 착실히 쌓아 나갔다.
“철 없던 젊은 나이에 집을 떠나 서울생활을 시작할 당시 막막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습니다. 그때는 수처작주, 어느 곳에서든 주인이 되라는 이 말을 가슴에 품고 살었어요. 조그만 가게 종업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정말 내 일처럼 일했죠. 이게 오늘날 나를 만든 원동력입니다.”
‘청년 이동석’은 1986년 석전자를 창업하면서 본격적으로 홀로서기에 나선다. 13년여간의 점원 생활을 접고 ‘사장 이동석’으로 변신한 그는 주로 학교 등 관공서를 상대로 전자부품 실습 기자재를 납품하며 세운상가에서 주목받는 젊은 사업가로 떠올랐다.
세운상가 밑바닥 생활에서 익힌 기술력과 근면·성실에 특유의 사교성이 더해지면서 거래처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인맥도 넓혀 나갔다. 그리고 그에게 또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실업자가 대거 양산된 1997년 외환위기(IMF). 일자리를 잃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전기·전자분야 자격증 취득 열풍이 불면서 석전자의 실습용 전자부품 기자재 주문이 불티나게 들어왔다.
이 회장은 당시 매출이 급성장하며 여유자금을 모았고 또다른 사업구상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회상한다. 이때 세운상가의 점포 50여개를 비롯 서울 도심의 빌딩을 사들이며 사업을 확장해 나간 발판이 됐다. 세운상가 전자부품가게 꼬마종업원이 불과 20여년만에 수십채의 점포주로 성장해 세운상가의 큰 손으로 변신한 것이다.
“경쟁업체와 같은 제품이라도 디자인을 좀더 세련되게 포장하거나 브랜드를 만들어 부가가치를 키워나갔죠. 경영적으로 항상 여유자금을 보유하면서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은게 석전자를 키운 배경이었습니다.”
그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사업분야를 확장한 이 회장은 한때 강원도 내 유선방송 인수에 실패하면서 거액의 손실을 입고 좌절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건 청년에 대한 투자였다.
당시 미국발 금융위기 속에서도 사업확장을 멈추지 않은 이 회장은 혁신적인 기술과 아이디어로 무장한 벤처기업에 주목했다.
2010년대 들어 벤처캐피털을 설립해 유망 청년기업의 창업자금을 지원하고 성장하기 까지 투자한 뒤 수익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사업확장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투자한 대표적인 업체가 속초 호텔마레몬스를 비롯 제주 9.81 테마파크 모노리스 등 10여곳에 달한다. 투자액은 대략 400억~500억원에 이른다.
국내 청년벤처기업의 대부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게 최근에는 게임업계와 엔터테이먼트분야에도 투자의 손길을 뻗쳤고 인천공항 인근에 제2의 모노리스 테마파크도 조성할 예정이다.최근에는 세운상가가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건축된지 60년된 옛 목욕탕건물을 매입해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사업경영이나 투자에서 가장 중시 여기는 것이 ‘신뢰’입니다.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신 분들은 날 신뢰했기에 도와주셨고 덕분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창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도 일상 속에서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근면 성실한 태도로 신뢰를 쌓으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지식 보다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말해주죠. 그래야 비록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회장은 세운상가의 입지전적인 사업가이면서 기부천사로도 유명하다.
재경화천군민회장을 맡고 있던 2008년 당시 고(故) 이수현씨의 실화를 그린 한일합작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가 자금난으로 영화수입에 어려움을 겪자 10억원을 내놓아 국내개봉을 성사시켰다.
이 영화는 2001년 1월 일본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술에 취해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고 숨진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제작된 작품이었다.
지난 2020년에는 고려대에 발전기금 1억원을 쾌척하는 등 인재양성을 위한 기부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고향에 대한 애정은 변치 않고 있다. 현재 강원도민중앙회 상임부회장을 맡아 애향심을 아끼지 않고 있다.지난 3월 고향사랑기부제가 도입되자 누구보다 먼저 기부가능한 최고액을 강원도에 선뜻 전달했다.
향후에는 교육재단 또는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해 고향과 청년들을 위한 체계적인 지원과 도움을 주고 싶다는게 그의 또 다른 프로젝트이다.
“다섯자녀를 키우는 가장이지만 가업승계나 재산을 물려주는데 별다른 관심이 없어요.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에서 이제 남은 삶은 고향과 사회에 작은 밀알이라도 남겨 보탬이 되고 싶은 생각이 크죠. 앞으로 적절한 사회환원 방식을 찾아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겨 나갈 계획입니다.”
이 회장은 이제 제3의 인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여전히 세운상가에서 그의 꿈과 열정은 식지 않고 있다. ‘인간 이동석’의 신화는 이제 또 시작처럼 보인다. 박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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