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포스트잇 대화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는 10·29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는 메모를 남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최근 문화연대의 ‘이태원 기억 담기’ 활동에 자원하여 애도의 메시지가 적힌 포스트잇들을 아카이빙할 수 있도록 수거·분류하는 작업을 도왔다. 외국어로 쓰인 메시지와 유족이 남긴 메시지는 따로 분류해야 하기에 하나하나 정성스레 읽어보아야 했다.
오래 벽에 붙어 있어 색이 바라고 구겨진 메모지를 조심스레 펼치고, 장마 기간 비에 씻겨 희미해진 글자들을 어렵사리 읽어내며, 나는 멀리서 부친 말들에 이제야 답하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포스트잇이 지닌 미약한 접착성에나마 기대를 걸며 누군가는 대화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메모는 어딘가에 붙어 독자를 기다리지만, 작은 바람에도 떨어질 수 있고 빗방울에도 지워질 수 있다. 그렇다면 대화는 성사되지 않고 실패하고 마는 게 아닐까. 응답을 기대할 수 없는 말 걸기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김승희 시인은 자신의 시에서 포스트잇을 “쓸 때면 늘 둘이” 된다고 말했다.(‘절벽의 포스트잇’,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창비, 2021) 통념과는 달리, 그는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 때가 아니라 말을 걸고자 하는 때를 대화의 시작이라고 판단한다. 읽히는 순간이 아니라 쓰이는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 그것을 읽어 주리라고 확신할 수 없는데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일까.
인간을 ‘하나의 대화’라고 표현했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주장을 참고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가 이야기하는 개념은 다소 복잡하지만, 단순화해 보면 이러하다. 그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서로 들을 수 있는 상태임을 가정해야 하므로 대화를 나누려는 이들이 동일자(同一者)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때 동일자가 된다는 것은 차이 없이 획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함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말하려는 이는 자신의 말을 듣게 될 존재를 상상하며 그를 이해하고자 노력할 것이기에, 말을 건네는 행위만으로도 어엿한 둘이 되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메시지가 실제로 누구에게 전해지는가 하는 문제보다 누군가 계속 메시지를 남긴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애도와 추모를 담은 메모지가 벽을 수놓은 광경을, 근래 자주 목격했다. 교권을 보호받지 못한 채 고통당하다 생을 마감한 서이초등학교 교사를 추모하기 위해 꾸려진 공간에는 “우린 모두 함께 있어요”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누구든 우리가 되어 깊은 애도에 동참할 수 있다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추모 공간에 놓인 “기억하겠습니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메시지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참사를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모두에게 당부하고 있다.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 서로 잘못을 떠넘기고 변명을 늘어놓는 동안, 그 고통을 제 것처럼 느끼는 시민들은 아프고 슬프고 분하고 미안해서 무엇이든 책임지려고 마음을 적어 붙이고 있다.
마지막까지 놓기 어려웠던 포스트잇의 말미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어쩌면 내가 될 수 있었던 너에게.” 나와 일면식도 없는 완전한 타자를 나일 수 있었던 너로 사유해 보며 마음을 나누는 일, 그리고 더 많은 너‘들’에게 함께 슬퍼하자고, 그러한 불행이 반복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자고 청유하는 일, 그것은 너무도 숭고한 일로 느껴진다.
누구라도 같은 위험에 놓일 수 있기에 누구도 다시는 그러한 고통을 겪도록 두고 싶지 않다는 다정하고도 굳센 다짐을 움켜쥔 사람들은 더욱 단단해진 손으로 대화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기꺼이 응답해 줄 이들을 기다리며 대화를 부치고 또 붙인다.
성현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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