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6411의 왼쪽 가슴, 다시 노회찬
정치인의 죽음을 제대로 추모하려면 판단과 결심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우상화, 권력화의 덫에 빠지기 쉽다.
2018년 7월 세상을 떠난 노회찬 전 의원. 세상은 그의 부재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정치적 공과보다 애틋한 서사의 기억이 더 컸고, 그의 상실에 슬픔은 분명했지만, 뭔가 분명하지 않은 분노 같은 것이 있었다. 당시 빈소에서 울음소리가 크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노회찬이 ‘6411 정신’으로 호명됐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지난해 4월 노회찬재단이 회원·시민 610명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45.1%가 노회찬 정신의 핵심을 ‘6411 투명인간’이라고 답했다. 이강준 노회찬재단 사업기획실장은 “약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되찾게 하는 것이 노회찬 정신이고, 이를 위해 6411 프로젝트를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단의 3대 핵심 사업인 노회찬 정치학교, 노회찬 아카이브, 노회찬 비전포럼은 6411 프로젝트의 긴 여정이다. <노회찬 평전> 저자인 이광호 전 진보정치 편집장은 진보정당의 실패에서 6411 정신을 재해석했다. “노회찬은 세상의 공기를 바꾸는 게 목표였고, 6411은 이를 실현하려는 노회찬의 언어였다. 그러나 진보정당은 약자들에게 여전히 투명정당이다. 진보정당이 투명인간들의 당으로 거듭나려면 노회찬의 언어를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6411 정신”이라고 했다. 진보정치가 현재에 맞는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그의 부재 5년을 관통했던 6411 정신, 진보는 어떻게 호명하고 있을까.
5년 전과 지금 두 차례 당을 이끌고 있는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진보의 이상과 현실’을 고민하고 있다. 이 대표는 “노회찬 정신은 진보가 힘을 갖자는 건데, 힘도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진보의 가치를 잃을 순 없다. 단적으로 정의당이 없었다면 (힘이 있는) 더불어민주당이 노동개혁을 하려고 했을까”라고 반문했다. 기후위기를 우선 헤쳐나가면서 노동, 복지 등 주요 현안에 ‘폭넓은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진보정당의 길을 찾겠다고 한다. 노회찬 진보정의당 대표는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무상보육 정책이 정의당보다 더 진보적이었던것에 충격을 받았다. ‘선진’(새누리당의 복지보다 앞선다는 의미) 복지국가, 경제민주화를 강조하며 사민당을 당명으로 제안했다. 복지에 관한 한 원조·정통 정당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기성 정당과 차별화하려는 시도였다.
노회찬 하면 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심상정 의원이다. 두 사람은 경쟁자였지만 분열과 통합의 진보정당사에서 항상 같은 길을 택한 동지였다. 심 의원이 확신하는 노회찬 정신은 ‘지속 가능한 제3정당’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정의당이 가치만 지키는 착한 정당이어선 안 된다. 시민들 지지가 유효한 시간 안에 문제해결 능력을 갖춘 정당을 만들자고 약속했다. 이게 노회찬 정신이고, 그 정신을 실천하는 방법이 선거제 개혁이다.”
두 사람의 결의는 2018년 4월 정의당과 민주평화당이 꾸린 교섭단체 ‘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으로 열매를 맺었다. 선거제 개혁은 정의당만으로 어렵다는 판단 끝에 민주평화당과 공조했고, 이 체제에서 노 전 의원은 진보정당 최초의 교섭단체 원내대표, 심 의원은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당내 반발이 심했지만 두 사람은 진보가 권력을 잡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인지 증명하고 싶었고, 선거제 개혁도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노 전 의원은 내각제와 정당명부제 비례대표제를 진보 집권의 주요 전략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 대표와 심 의원의 6411 정신은 정체성과 현실적 힘이라는 진보정치의 딜레마를 드러낸다. 최근 정의당 자장 안에서 벌어지는 이합집산을 보면 6411 정신이 진보의 길인지 아닌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페미니즘 때문에 진보정치가 실패했다는 말이 나올 때부터 ‘저들이 노회찬 정신을 말할 수 있나’ 싶었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성별 분업 폐지를 외치고, 3월8일 여성의날이면 장미연대를 만들었던 게 노회찬 정신 아닌가. 진보정치가 6411 정신을 이어갈지, 수정할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버스를 늘려서라도, 출근시간을 늦춰서라도 6411이 나아가길 바란다. 노회찬의 부재로 진보가 줄어드는 것은 정의당을 위해서도, 한국 정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장례식에서 고개 숙여 흐느꼈던 투명인간들에게, 그래도 ‘왼쪽 가슴을 뛰게 했던’ 정치인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구혜영 논설위원 koo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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