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의 이야기의 발견] 비밀의 완성

기자 2023. 8. 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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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이는 상자 하나를 손에 쥐게 되었다. 다소 거친 표면에 나이테가 줄무늬처럼 보이는 나무 상자였다. 뚜껑에는 경첩이 있어 여닫을 수 있고, 단순한 형태의 잠금장치도 달려 있었다. 어른용 손목시계 하나가 들어가기에 맞춤한 크기였다. 아이는 설레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어보았다. 상자 안은 비어 있었다.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어릴 때는 대부분 그렇듯 아이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아이 노릇은 힘들었다. 하지 말라는 것도 많고 하라는 것도 많았다. 아이는 어른의 삶을 잘 몰랐으나 그들은 다르게 사는 것 같았다. 어른들은 아이 앞에서는 말을 멈추기 일쑤였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궁금한 것을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온 적은 드물었다. 어른의 삶에는 비밀이 깃들어 있었다. 아이에게 비밀이란 뚜껑이 달린 빈 상자 같은 거였다.

아이는 상자 안에 무엇인가를 넣어두고 싶었다.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동구 밖에 외따로 서 있는 포도나무였다. 며칠 전 아이는 여름의 첫 포도송이를 발견한 터였다. 상자를 들고 달려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큼직한 포도알 하나가 연두색들 사이에서 밤하늘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이는 침을 삼키며 잘 익은 포도알을 떼어내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쓸모없는 물건들이 쌓여 있는 다락 구석에 숨겨두었다.

일부러 비밀을 만든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라서 아이답게 한동안 상자를 까맣게 잊었다. 애꿎게 야단맞은 설움을 삭이느라 다락에 올라갔다가 상자를 기억해냈다. 아이는 자신이 넣어둔 비밀에 뭔가 특별한 일이 생겼을 것이라 기대하며 뚜껑을 열어보았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쪼그라든 포도알을 살펴보다가 아이는 흠칫 놀랐다. 쌀알보다 작은 하얀 구더기들이 상자 바닥과 곰팡이 핀 포도알 위에서 꼬물거리고 있었다. 얼른 뚜껑을 닫았다.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었으나, 그 무렵 세상에서 비밀이 사라져갔다. 한동안 비밀이 너무 흔했고 그다음에는 자주 폭로되었다. 돈을 벌려고 스스로 비밀을 공개하는 이들도 있었다. 드러난 비밀에는 늘 곰팡이와 구더기가 꼬였다. 겪어 보니 어른의 삶에는 슬픔이 더 많았다. 비밀은 저절로 만들어졌으나 지키는 것은 어려웠다. 아름답고 부주의한 연인을 잃은 디오니소스의 슬픔을 깊이 이해하면서 그는 진짜 어른이 되었다. 이따금 어린 시절의 동구 밖에 서 있을 주인 없는 포도나무를 떠올렸다. 먼 옛날 누군가가 연인을 묻은 자리에 심은 게 아니었을까.

빈 상자 같은 삶을 살면서 그가 자주 하는 일은 인터넷 쇼핑몰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등산화, 침낭, 텐트 같은 것들을 높은 가격 순서대로 정렬한 뒤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가격은 상관없이 품질과 디자인만 평가했다. 구매자의 리뷰까지 읽어본 뒤, 마음에 드는 제품을 선택했다. 그런 식으로 장바구니에 넣어둔 물건이 수십 가지였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장바구니의 물건들을 모두 삭제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구두, 정장, 핸드백 같은 것들로.

새벽에 잠이 깬 날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살펴보았고, 새 메시지가 있다는 알림을 발견했다. ‘장바구니에 담아두신 상품이 품절되기 전에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쇼핑몰에서 보낸 메시지를 읽으며 그는 수치심을 느꼈다. 비밀번호를 걸어놓은 장바구니도 비밀을 담아두기에 적당하지 않다니. 잠이 모자라 뻑뻑한 눈을 비비며 그는 창문을 열었다. 회청색 하늘에 창백한 별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그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 우주 공간에서 출발한 빛을 자신이 보고 있음을 알았다. 별은 지금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역시 지금이 아닌 순간에는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자 자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별빛처럼 반짝이는 기쁨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에게 함부로 드러나지도 숨겨지지도 않는 비밀 하나가 생겼다.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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