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아! 1898년
1898년은 한국근대사의 분수령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로 일본이 세운 갑오정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근대적 정책을 쏟아냈다. 하지만 일본의 통제하에 있었고, 너무 서두른 탓에 민심을 얻지 못했다. 삼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쇠퇴하고 고종이 아관파천을 해버리자 단박에 무너졌다. 고종은 러시아에 의지하려고 했지만, 독립협회에 집결한 개화파들은 그 러시아마저 밀어내고자 했다. 러시아가 절영도 조차와 군대 주둔을 계획하자 독립협회는 종로에 초유의 대중 집회를 조직했다(1898·3·10). 여기에는 서울시민의 17분의 1인 1만여명이 운집했다
정부는 다음날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철수를 약속했다. 갑오개혁이 이런 대중적 기반 위에서 전개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운 일이다. 조선에서 함께 물러난 일본과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주권과 완전한 독립을 확인하고 대한제국이 군사교관이나 재정고문을 초빙하더라도 양국이 서로 동의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협약을 체결했다(니시-로젠협정). 드디어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가 왔다! 외세는 모두 물러가고 국내 개화파의 역량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져 있었다.
만민공동회는 그 후로도 숭례문, 종로 등지에서 연일 개최됐다. 러시아뿐 아니라 독일, 일본도 비판의 타깃이었고, 국토 조차 반대, 철도·전신부설권 양여 반대, 무관학교 학생선발 부정 비판 등 이슈도 다양했다. 거기에는 개화파 지식인뿐 아니라 백정을 포함한 서울시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주도적 역할을 했다. 게다가 정부인사, 특히 친미개화파에 가까운 유력 고관들도 적잖은 역할을 했다. 그야말로 관민일체의 개혁운동이었다(한철호 <친미개화파 연구>). 개혁파 정부와 독립협회는 기존의 중추원을 개편해 11월5일 의회를 설립한다는 내용의 중추원 신관제(新官制), 즉 의회설립법을 공포했다. 개화파들에겐 꿈만 같은 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회 개원 전날 밤, 즉 11월4일부터 5일 새벽에 걸쳐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의회 설립을 취소해버렸다. 분노한 개화파와 서울시민들은 연일 만민공동회를 열어 독립협회 복구와 의회 재설립을 요구했다. 이때부터 12월23일까지 한국사상 최장기간의 철야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고종은 2000명의 보부상과 군대를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기습하고 430여명의 개화파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한국근대화의 마지막 기회는 그렇게 차디찬 12월의 한가운데서 동결돼 버렸다(<신편한국사> 41권).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젊은 활동가들은 한국사에서 처음 출현한 근대인들이었다. 대부분 1870년대생들로 개화물결 속에서 성장했고, 한문교육은 받았지만 과거시험과는 무관했다. 청소년 시절 사실상의 조선통감 위안스카이와 이에 빌붙어 개혁을 방해한 민씨 정권의 전횡에 분개했고,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의 오만방자한 행태와 천인공노할 민비 시해를 목도한 이들이었다. 서울 만민공동회를 주도한 이승만(1875년생), 평양 만민공동회에서 그 유명한 ‘쾌재정(快哉亭)의 연설’로 청중을 격동시킨 안창호(1878), 만민공동회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한때 동학운동에 가담했다가 이 무렵 개화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김구(1876), 황해도 유수의 개화파 집안의 장남으로 ‘민권과 자유’를 외치던 안중근(1879) 등이 그들이다.
1898년의 좌절 이후 이 ‘1870년대생’들의 행방은 자못 상징적이다. 이승만은 이듬해 1월 투옥되어 5년7개월을 복역했고, 안창호는 미국으로 떠났다. 김구는 절에 들어갔고, 천주교 신자들의 재판사건에 간여하던 안중근은 ‘서울 놈’들의 학정에 분을 삭이지 못했다.(황재문 <안중근평전>, 103~105쪽) 1898년 그해 겨울 예정대로 의회가 설치되었더라면 을사보호조약도, 한국병합도 그렇게 간단히는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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