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원주 아카데미극장’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
어린 시절, 방학이 되면 외가가 있는 강원 원주에 가곤 했다. 외가에 대한 기억은 늘 애틋하고 정겹다. 어른들이 모두 출근하고 나면 나는 시집간 큰이모가 운영하는 만화가게에 가서 만화를 보거나 혼자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자주 갔던 곳은 시내의 극장 거리였다. 원주역에서 시장 쪽으로 걷다 보면 원주극장과 문화극장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시공관과 아카데미극장이 있었고 한 블록쯤 떨어진 곳에 군인극장이 있었다.
나는 극장 앞에 붙어 있는 현재 상영작과 상영 예정작의 포스터와 사진, 극장마다 크게 걸려 있던 영화 간판을 한참 들여다보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이 극장들은 대체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에 걸쳐 지어졌다. 이는 원주만의 일이 아니다. 대부분 지역의 도시들에서 이 시기에 많은 극장들이 세워졌다. TV가 대중적인 매체가 되기 전 서민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고 웃음과 눈물의 위안을 제공하던 가장 중요한 문화는 영화였다. 1960년대에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대중의 문화적 욕망도 커졌고 이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으로 채워졌다. 각 지역의 돈 많은 부자들은 서둘러 극장을 짓고 흥행시장에 뛰어들었다.
극장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때론 단체 관람을 온 초등학생·중학생으로 시끌벅적했고 휴가 나온 군인들과 데이트하는 연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한복을 곱게 빼 입고 눈물 펑펑 흘릴 작정으로 손수건까지 지참한 어머니들로 메워지기도 했다. 그 시절 극장은 가장 중요한 집단적 문화체험과 실천의 공간이었고,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 기억의 장소였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흐르는 동안 모든 도시들이 그렇듯 원주도 엄청나게 변했다. 고층 아파트들이 늘어서고 신시가지가 형성되면서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많은 장소들이 사라졌다. 내가 사진과 간판을 들여다보며 머릿속으로 갖가지 이야기들을 상상하던 극장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거의 기적적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 원주 아카데미극장이다. 1963년에 지어진 아카데미극장은 멀티플렉스가 일반화되면서 과거의 단관극장이 사라진 지금 이 나라에서 원형을 유지하고 남아 있는 유일한 단관극장이다. 게다가 이 극장은 1960년대 모더니즘 건축의 미학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구현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보존되어 마땅한 건물이란 얘기다.
그런데 지금 원주시는 이곳을 철거하고 다목적 공연장과 주차장 건설을 추진한다고 한다. 원주의 뜻있는 시민들이 아카데미극장 보존을 위해 단체를 결성하고 다양한 행사와 활동을 통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난 7월26일에는 아카데미극장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극장 앞에 모여 이곳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할 것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그분들의 뜻에 공감하며 전적인 지지를 표한다.
근대의 문화공간은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기억이 깃든 장소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역사적 경험의 기억이야말로 문화의 핵심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문화도 소멸한다. 지난 세월 자본과 권력에 의해 공간이 상품화되고 수많은 기억의 장소들이 파괴되는 일이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우리는 오랫동안 정작 바꿔야 할 것들은 그대로 둔 채 산천을 파헤치고 기억의 장소들을 파괴하며 이를 발전이라 믿어오지 않았던가. 근현대사의 흔적과 함께 기억을 보존하는 일은 문화를 살리고 풍부하게 하는 일이다.
한국 영화의 세계적 위상이 날로 높아지는 지금, 원주 아카데미극장은 그 자체로 한국의 근대 영화산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장소로 활용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가진 공간이다. 그 원형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발휘하는 명소로 발전시킬 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주 시민들의 바람대로 원주 아카데미극장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오랫동안 보존·활용되길 바란다.
김창남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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