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판’ 숙련자 부족한데… 부실 감리·카르텔로 안전 뒷전 [철근 빠진 아파트]

박세준 2023. 8. 2.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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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시공·감리 총체적 문제
수십년간 ‘벽식 구조’ 건설이 관행
철근 등 공사비 급등도 원인 지목
“지상공간도 철근 누락 살펴봐야”
팬데믹 때 외국인 인력 막혔는데
공사는 급증 미숙련자 대거 투입
‘전관’ 용역업체 감독 미비 ‘합작품’

지난해 1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광주 화정 아이파크 201동의 39층 바닥 면부터 23층 천장까지 구조물이 붕괴되면서 건설노동자 6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정부 건설사고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설계도와 다르게 바닥 시공 방법과 지지 방식을 임의 변경해 시공한 사실이 드러났다. 현장에서 채취된 콘크리트의 강도 역시 허용범위에 미달되는 수준이었다.

올해 4월에는 인천 검단 신축 아파트 단지의 지하주차장에서 상부 슬래브가 무너져내렸다. 설계부터 기둥 32개 중 15개에서 전단보강근(철근)이 누락됐고, 시공 과정에서도 최소 4개 이상의 기둥에서 철근을 빼먹은 것으로 드러났다. 공사 발주처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검단 단지 같은 무량판 구조가 적용된 지하주차장들에 대한 전수조사를 거쳐 ‘철근 누락’ 현장이 전국 곳곳에 퍼져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보강공사 안내문 게시된 주차장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아파트 15개 단지의 지하주차장 기둥에 철근이 누락된 데 대해 입주민 요구 사항을 반영해 보강 공사를 진행하겠다고 2일 밝혔다. 사진은 전날 부실 시공 단지 15곳 중 한 곳인 경기 남양주시 별내퍼스트포레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지지대 설치 및 보강 공사 관련 안내문이 붙어 있는 모습. 남양주=최상수 기자
2일 건설업계에서는 연이은 부실 건축물 논란은 설계부터 시공, 감리까지 모든 공사 과정의 총체적 문제가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공사 모든 단계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업계 전반의 안전 의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번에 철근 누락이 확인된 15개 단지 중 10곳은 공사의 첫 단추가 되는 설계부터 문제가 있었다. 무량판 구조는 대들보를 없애고 기둥이 슬래브를 받치는 형식인 만큼 기둥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철근을 충분히 감아 주는 게 기본이다. 이들 단지는 설계 때부터 하중 보완을 위한 철근의 개수를 잘못 계산하거나 단순 실수로 아예 누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나머지 5개 단지는 시공 과정에서 철근을 누락했다. 다른 층의 도면을 잘못 보고 철근 배근을 하느라 있어야 할 철근이 빠진 사례도 있었다. 여기에 더해 15개 단지 모두 감리를 맡은 업체가 철근 누락을 잡아내지 못했다.

국내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우리나라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는 수십년 간 벽식 구조가 자리를 잡으면서 설계와 기술 전문가 중에서 무량판 구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많은 게 사실”이라며 “설계가 제대로 됐다고 해도 일부 현장에서는 최소 기준 이상으로 넉넉하게 철근이 반영됐다고 생각하고 안이하게 철근 몇 개는 빠져도 무방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일 경기 남양주 시내 한 신축 아파트 건설현장의 모습. 뉴스1
최근 급등한 공사비도 일선 현장에서 안전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2020년 상반기 1t당 541달러였던 철근 가격은 올해 상반기에는 1031달러로 2배 가까이 뛰었다. 2년 전 1t당 7만5000원대였던 시멘트값도 최근에는 12만원 안팎으로 올랐다.

원가 절감을 위해 인력을 줄이고 공사 기간을 촉박하게 잡는 바람에 안전한 설계와 시공, 감리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됐다는 것이다.

최명기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단 교수는 “지금은 지하주차장의 무량판 구조만 전수조사하고 있는데, 지상 공간도 철근이 누락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LH 아파트든 민간 아파트든 전부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국토부가 철근이 빠진 15개 아파트의 콘크리트 강도는 설계 기준 강도를 초과했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 최 교수는 “콘크리트 강도에 대한 조사 결과도 공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최원철 한양대 부동산융합대학원 특임교수도 “부실 시공은 코로나19 때 나온 (건설 현장의) 전반적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코로나19 시기 외국인 근로자들은 못 들어오는데 집값 폭등으로 분양이 늘면서 현장 경험이나 기술이 없는 사람들이 현장에 투입됐다”며 “현장에서 일을 대충하는지 감리가 확인했어야 하는데 자세히 보지 않았던 것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연합뉴스
LH의 전관예우 관행이 역량이 부족한 설계·시공사를 선정하는 데 일조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실에 따르면 LH에서 근무한 2급 이상 퇴직자가 최근 5년간 재취업한 용역업체 중 LH와 계약한 업체는 9곳이었다. 이들 업체에 재취업한 2급 이상 퇴직자는 총 10명이었다. 이들이 2019년부터 올해까지 LH와 계약한 설계·감리 건수는 204건, 규모는 2319억원 수준이었다.

LH는 공사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퇴직자의 규모가 클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관련 업계의 재취업이 많은 것이라며 전관 특혜는 없었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건설업계에서는 LH 퇴직자의 직접적인 입김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유·무형의 입찰 노하우를 파악하기 위해 ‘퇴직자 모셔 오기’ 경쟁이 일상화돼 있다고 토로한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는 LH가 최근 7년간(2016∼2022년 6월) 2급 이상 퇴직자가 재취업한 업체와 8051억원(150건)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박세준·조희연·김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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