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라는 이름의 가해

한겨레 2023. 8. 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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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세상읽기]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최근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학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숨지기 전 그는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렸고 학교에 수차례 상담을 요청했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며 거리로 나온 전국의 교사들은 이미 그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교권 침해 소송” 지원을 위해 1억6055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이 단체 단일 회의에서 결정된 최대 액수다. 교사가 “아동학대” 혐의로 고발 및 피소된 사례가 전체 87건 중 44건으로 절반이 넘은 것도 처음이다.

이 기금으로 교사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변호사 동행료를 보조하고, 소송 심급별 최대 500만원씩 지원한다. 고발당한 교사들은 수업 배제, 담임 박탈 등의 조처에 더해 힘겨운 재판 과정을 견뎌야 하는데, 변호사 선임료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재판을 거치며 상처 입은 교사들은 가르칠 열정과 용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학교에 침투한 사법폭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학교폭력 가해자 전략”이 폭로되면서 우리가 분노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지 않았나. 가해자 쪽은 우선 학교폭력심의위원회의 결정에 불응하거나, 징계에 반대하며 교육청에 재심을 청구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쟁은 법정에서 벌어진다. 징계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심판을 걸면 1심, 2심, 3심까지 끌고 갈 수 있으며 그동안 징계의 효력을 정지하는 집행정지 신청도 할 수 있다. “고작 애들끼리 싸운 걸 가지고” 입시를 망칠 수는 없다며 가해자들은 끝까지 간다. 그러나 학교폭력 피해자는 대부분 “돈 없고 힘없는 집”의 자녀들이니, 법정 싸움을 감당할 도리가 없다.

젠더폭력은 또 어떤가. 사례를 말하자면 끝이 없다. 나는 2022년 ‘황해문화’에 기고한 ‘젠더폭력의 공동체적 해결’에서 사법 절차가 진행되면서 “가해의 총량이 계속 증가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가해자가 종국에는 유죄판결을 받고 민형사상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경찰 및 검찰 조사, 증인신문, 피고인의 공격적 변론과 허위 진술과 같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나날이 새로운 가해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해자는 치유, 배상, 그리고 정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오히려 또 다른 상처와 트라우마를 얻게 된다.

근대국가의 사법제도는 일탈한 범죄자를 훈육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의 법정에서 벌어지는 일은 “기득권 보호”와 “약자 처벌”이다. 인맥과 자원을 바탕으로 사법제도를 악용하고 호화 변호인단을 꾸릴 수 있는 자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을 “합법적으로” 괴롭힌다. 그 폭력을 견디다 못해 누군가는 재판 도중에 포기하고, 누군가는 힘들게 승리하지만 그 과정에서 너덜너덜해진다.

법을 이용해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자신의 행위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예컨대, 부모로서 자녀를 지켜야 하니까. 이어서 변호사들은 이 모든 행위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며, 가해자에게도 “피고인의 방어권”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술수를 동원하도록 장려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행위가 “정당한 폭력”, 심지어 “윤리적 폭력”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소비자 갑질”이 아니다.

사법부는 법조 시장의 폭력을 방조할 뿐 아니라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는 국가와 시장의 공모가 어떻게 새로운 종류의 사법폭력을 생산하고 증식시키는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경쟁이 격화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호사들은 “사건이 안 되는 사건”을 수임하고 성공보수를 위해 무리수를 둔다. 누군가를 “아동학대 범죄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인지하더라도 변호사들은 가해에 동참하기를 택한다. 무리한 변호 행태가 보편화되면서 심지어 판사들조차 법정에서 일어나는 가해를 묵인하는 경우가 흔하다.

불안정한 시장에 던져진 이들의 생존 경쟁, 타인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적대와 폭력, 그리고 권력과 돈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 사회는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처벌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보호 장치도 안전망도 없이, 신자유주의적 처벌 메커니즘에 잠식된 상태로 우리 사회는 망가져가고 있다. 이를 또 다른 폭력으로 해결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 끝없는 가해와 피해의 고리를 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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