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이드 오코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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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나는 시네이드 오코너의 1992년 사건을 생방송으로 봤었다고, 마치 역사의 증인이라도 된 것처럼 지인들에게 말하곤 했다.
앵글로색슨계와 개신교가 지배적인 나라에서 가톨릭은 비주류 민족의 종교였고, 오코너의 행동은 그들의 정서적 구심점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사건 덕분에 나는 올바른 궤도로 돌아왔던 거예요." 이 비범한 낙관론에서 군중들이 그녀를 비난했던 것은 결국 문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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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크리틱]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오랫동안 나는 시네이드 오코너의 1992년 사건을 생방송으로 봤었다고, 마치 역사의 증인이라도 된 것처럼 지인들에게 말하곤 했다. (엄밀히 말해 ‘생방송’은 아니었다. 에이에프케이엔은 한주 전의 방송을 틀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녀가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에서 기타를 메고 노래하다가, 카메라 앞에서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사진을 세로로 쫙 찢은 뒤, 무대의 촛불을 불어 끄고 어둠과 정적 속에서 퇴장하는 모습이다. 이번에 찾아보니 크게 틀린 기억은 아니지만 기타는 없었다. 그녀는 밥 말리의 노래 ‘워’(War)를 아카펠라로 불렀으며, 끝에 교황의 사진을 쫙쫙쫙 세 번 찢은 후 “진짜 적과 싸우자!”라고 외치며 앞으로 던졌다. 우리는 이 퍼포먼스가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을 가톨릭교회가 은폐해 온 것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알고 있다.
의도했던 충격 자체는 매우 잘 전달되었음이 밝혀졌다. 곧 방송사에 수천 통의 항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다음주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에서 호스트로 나온 배우 조 페시는 오코너가 찢은 교황의 사진을 테이프로 붙여서 들고 나와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다. “내 방송이었으면 한 대 쳤을 겁니다.”(긴 박수갈채.) 가수 마돈나도 한마디했다. 몇해 전 바티칸은 마돈나의 에로틱한 뮤직 비디오를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하고 이탈리아 공연까지 방해한 바 있었다. “오코너의 방식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오코너는 며칠 뒤 뉴욕에서 찬조 출연한 무대에 섰다가 격렬한 야유를 받고 눈물을 보였다.
조 페시나 마돈나 같은 이탈리아계가 전면에 나선 과정을 보면, 오코너의 행동이 왜 미국에서 큰 반발을 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미국이 종교색이 짙은 보수적인 국가여서만은 아니었다. 아일랜드인인 오코너에게 가톨릭교회는 국가와 융합된 권력 그 자체를 의미했다.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앵글로색슨계와 개신교가 지배적인 나라에서 가톨릭은 비주류 민족의 종교였고, 오코너의 행동은 그들의 정서적 구심점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사건으로 그녀가 테러를 당하거나 경력이 끝나지는 않았다. 오코너는 계속해서 앨범을 발표하고,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단 미국에서 증발한 인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주 정확한 사인이 알려지지 않은 채, 유족의 충격과 슬픔만이 언급된 시네이드 오코너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는 56세였다. 많은 이들이 1992년의 그 사건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마 그중 상당수는 그녀의 행동이 지금 그렇게 뜬금없지도, 기괴해 보이지도 않는다는 데 새삼 놀랐을지 모르겠다. 지난 31년간 여러 일들이 있었다. 교황청은 사제들이 관련된 아동 성추행 사건에 몇 번이나 사과해야 했다. 종교 또는 종교화된 조직은 성적인 포식자들이 서식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게 됐다.
오코너는 일관되게 그 행동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해 왔다. 그건 자신이 옳아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저항 가수였지, 팝스타가 될 생각이 없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그 사건 덕분에 나는 올바른 궤도로 돌아왔던 거예요.” 이 비범한 낙관론에서 군중들이 그녀를 비난했던 것은 결국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코너가 보기에, 이 사건에서 세상사람 누구도 그녀를 오해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제 아무것도 타협할 필요가 없게 된 오코너는 이 자유 속에서 평생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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