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 ‘증후군적 세상’에도 환대와 연민의 손이 있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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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에서는 환자의 상태를 표현할 때 증상과 징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증상을 '병을 앓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태나 모양'이라고 정의하고 징후를 '겉으로 나타나는 낌새'라고 해 구분이 애매하다.
증후군적 세상에서 과연 나는 어떤 증상과 징후를 앓고 있는지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보는 것, 자신을 향해서도 남을 향해서도 비난과 증오가 아니라 환대와 연민의 손을 내미는 것이 무너져 내리는 세상을 지탱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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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강윤식 | 경상국립대 의과대학장
의학에서는 환자의 상태를 표현할 때 증상과 징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증상을 ‘병을 앓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태나 모양’이라고 정의하고 징후를 ‘겉으로 나타나는 낌새’라고 해 구분이 애매하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증상은 ‘본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아픔이나 불편한 감각’으로, 징후는 ‘외부적으로 관찰 가능한 이상 상태’로 구분한다. 그러니까 통증이나 가려움은 자신은 느끼지만 다른 사람이 관찰할 수는 없으므로 증상이고, 피부의 발진이나 인후의 부종 같은 관찰 가능한 상태는 징후다.
이 둘을 합쳐서 증후(증상과 징후)라 하고, 병리적 기전이 분명하지 않아도 동일한 증후를 보이는 병을 아무개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지난 몇 주간 우리 사회에서 말과 글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비극적 사건과 죽음이 연이어 발생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로 인해 온 국민이 경험하는 충격과 외상이 크다. 이런 일들이 개별적이고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깊고 넓게 뿌리박은 병리적 구조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사람들이 안고 있는 불안과 분노, 편 가르기나 두려움 같은 부정적 생각과 감정들이 너무 크고 거대해져서 땅 아래를 흐르는 용암처럼 온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가 이런 극단적 상황으로 터져 나오는 느낌이다. 그래도 전에는 그런 일들이 예외적이고 산발적인 것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서로 잇대어 벌어지면서 누가 봐도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하나의 증후군으로 서로 단단히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게 됐다고나 할까.
우리 공동체가 힘들여 쌓아 온 연대와 협동의 체계가 곳곳에서 무너지면서 각자도생조차 하기 어려운 이들부터 쓰러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와르르 와르르 들려오고 있다. 그래도 나는 가진 자원이 있으니 괜찮다고 할 것인가. 과연 그 자원은 얼마나 유용한 것인가. 설혹 그렇게 자신과 가족을 지켜낸다 하더라도 이토록 살벌해져 버린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도대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일까.
증상과 징후가 동일해 진단명을 붙일 수는 있지만원인이나 기전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를 증후군이라고 한다고 했다. 비록 원인이 명확하지 않아도 의사들은 경험을 통해, 그리고 추정 가능한 지식을 동원해 증후군을 치료한다. 칼로 두부 자르듯이 한 번에 병을 낫게 할 수는 없다 해도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최선임을 대부분의 의사는 경험적으로 안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가, 더 나아가서는 온 세상이 앓고 있는 이 증후군적 사태를 한 번에 해결할 방법이나 제도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살펴 본다면 온갖 굴곡과 비극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조금씩이나마 모든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고 지키는 쪽으로 움직여 왔다고 믿는다.
증후군적 세상에서 과연 나는 어떤 증상과 징후를 앓고 있는지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보는 것, 자신을 향해서도 남을 향해서도 비난과 증오가 아니라 환대와 연민의 손을 내미는 것이 무너져 내리는 세상을 지탱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여기까지 다다른 인간집단의 힘이 서로를 살리는 쪽으로 갈지, 결국 함께 멸절하는 쪽으로 가게 될지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더 지혜를 발휘하는 것, 조금씩 더 자제심을 갖는 것, 공동체를 위해 조금씩 더 양보하는 것이 우리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자리가 아닐까. 그렇게 하다 보면 나만이 아니라 함께 그 길을 가는 작은 손들이 있음을 알게 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그 손들을 붙잡고 살아가게 되는 것 아닐까라고 다만 믿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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