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멧 속 끓는 더위…“음식 10초만 늦게 나왔으면 싶죠” [현장]
“배달할 음식이 10초만 늦게 나왔으면 할 때가 있어요. 배달 나가려고 가게 문 여는 순간 뜨거운 공기가 훅….”
폭염경보가 내린 지난 1일 경기도 수원 인계동 한 주택가. 중국집에서 갓 ‘탕볶밥’을 가지고 나온 배달 플랫폼 노동자 소진옥(43)씨의 오토바이가 섭씨 34도 공기를 갈랐다. 햇볕을 막는 기능성 긴팔 티셔츠에 다리 토시, 쿨마스크로 무장했지만, 몸에선 땀이 멎지 않았다. 이날 행정안전부는 폭염 위기경보 수준을 ‘경계’에서 ‘심각’ 단계로 높였다. 2019년 이후 4년 만에 폭염에 따른 ‘심각’ 경보 발령이었다.
■ “이러다 객사하겠다 싶지만…하루 40콜 받아야 생계 유지”
그는 헬멧을 탓했다. “헬멧 안은 체감상 50도에 가까워요. ‘이러다 객사하겠다, 집에 가고 싶다’하면서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소 씨에게는 ‘폭염을 견디는 시간’이 곧바로 생계와 이어진다. “먹고살기 위해 그냥 참고 하는 거예요.”
이날 한겨레는 기후환경단체 ‘환경정의’와 함께 13년 차 배달 노동자 소씨의 하루 노동을 동행했다. 소씨는 3년 전부터 배달의민족 라이더로, 대개 오전 9시~오후 9시 하루 12시간 일한다. 배달 단가는 플랫폼 알고리듬을 따라 일하는 다른 라이더의 수, 고객 수에 따라 오르내린다.
일하는 라이더 수가 적고 배달 요청이 많은 최악의 기상 조건 때, 배달 단가가 더 오른다. 플랫폼 노동자 소씨가 극한 더위 앞에 더 세게 오토바이 핸들을 쥐는 이유다.
소씨는 4층 빌라 끝 집 문앞에 포장된 탕볶밥을 놓고, 사진을 찍은 뒤 후다닥 계단을 내려왔다. 이 빌라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다시 오토바이에 앉기까지 50초 걸렸다. 쉴 틈 없이 다음 배달 콜을 잡았다. “이미 조리가 되어 있다고 해서 빨리 가야 해요.” 소씨의 발걸음이 다급하다.
“라이더들마다 ‘나는 하루 얼마를 벌어야 돼’ 기준이 있어요. 저는 아내와 아이가 있으니 기본 배달료 3000원으로 치고 하루 40콜은 받아야 생활이 유지돼요.”
이날 오전에만 소씨의 휴대전화에 행정안전부의 폭염경보 안내 문자가 세 차례 울렸다. ‘야외활동 자제, 충분한 물 마시기와 휴식으로 건강에 유의 바람.’ 소씨가 휴식을 취할 유일한 시간은 배달 음식을 가지러 가게로 들어서는 1분 안팎 시간이다. 가게에 들어선 소씨는 우선 정수기부터 찾았다. “정말 물을 먹고 싶어서 물 한잔이 급한데 정수기가 없는 가게도 있어요.”
지자체가 소씨같은 이동 노동자를 위해 쉼터를 마련했다지만 경기도 전역에 13곳, 소씨가 일하는 수원에는 단 한 곳뿐이다. 소씨는 쉬려고 쉼터를 들러본 적이 없다. 역시 ‘시간’과 ‘배달 건수’가 소득과 직결되는 노동의 특성 탓이다. “언제 쉼터까지 찾아가서 쉬다 나오겠어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 기상 나쁠 때 돈 더 주는 ‘기상 할증’…노동자 극한상황 몰아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이나 ‘쿠팡’ 같은 대형 배달 플랫폼 기업의 체계적인 폭염 대비 안전 교육이나 온열질환 대책은 미미하다. 오히려 업체 쪽에선 날씨가 나쁠 때 돈을 더 주는 ‘기상 할증’을 하기 때문에, 폭염에 더 많은 일을 한다는 게 소씨 설명이다. 실제 1시께, 섭씨 33도를 넘자 소씨의 배달 단가도 ‘할증 1000원’이 붙었다.
고용노동부의 온열질환예방가이드는 폭염 특보 시 규칙적인 휴식, 옥외 작업 제한 등을 권고한다. 다만 특정 사업장이 없고, 사용자도 불분명한 플랫폼 배달 노동자에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구교현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은 “야외에서 일하는 시간이 곧 소득인 노동자에겐 휴식에 따른 수입 보장 같은 제도 대신 ‘더위 할증’ 같은 유인책만 있다. 돈으로 노동자를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극한 기후 앞에 잠시 일을 멈출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라이더 유니온은 ‘(가칭)기후실업급여’ 도입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극한의 폭염 상황에서는 배달 노동자의 ‘작업 중지’를 일시적 실업상태로 간주하고, 통상 수입의 70%를 지급하자는 것이다.
김종진 유니온센터 이사장은 “배달 등 옥외 노동자의 건강권을 위해서는 정규 업무 시간을 줄이고 유급 수당을 주는 방식으로 폭염에는 쉴 수 있는 임금체계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소씨는 밤 9시 가까운 시각이 돼서야 끓는 듯한 헬멧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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