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또 다른 나, 화가 하지원의 세계 "그리며 치유 됐어요" [TD현장]
[티브이데일리 김지현 기자] '화가 하지원'을 만난 건 정말 우연의 일이었다. 7월, 핫플레이스 성수동 거리를 거닐다 한 포스터를 목격했다. '하지원의 첫 전시회'라고 쓰인 포스터다. 흥미롭게도 이 포스터들은 좁다란 골목에 위치한 한 삼겹살 식당에 부착돼 있었다.
'화가 하지원의 첫 전시회'가 삼겹살 집 바로 옆이란다. 몇 걸음만 옮기면 전시회를 무료로 볼 수 있다니, 직업 정신 발휘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 날, 이 식당을 지나지 않았다면 하지원과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운수 좋은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알아보니, 하지원의 단골 식당이라고 한다.)
전시회는 2층부터 시작됐다.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는 스태프의 설명. 화이트 시멘트 사이에 걸린 버츄얼 비너스(Virtual Venus) 시리즈들이 눈에 띈다. 얼굴 없는 인간들이 엉퀴고, 뒤섞여있다. 같은 주제의 작품들이 주는 느낌이 각각 다르다. 어둡고 그로데스크한 작품이 있는가하면 어떤 작품은 화사하고 화려하다. 공통점은 모두 같은 인간들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생김새가 제 각각 다르다는 것. 누군가의 손가락은 5개, 누군가의 손가락은 세 개인 식이다. 골똘히 봐야 한 사람, 한 사람 다르다는 걸 눈치챌 수 있는 작품이다.
'버츄얼 세계의 인간을 바라보는 하지원의 시선일까?' 궁금해지는 찰나, 하지원이 관람객들과 함께 등장했다. 이벤트일까? 팬이거나 기자처럼 우연히 전시회를 찾은 사람들 사이에 하지원이 서 있다. 무리에 섞여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전시회의 주인공인 동시에 큐레이터인 하지원의 모습이 낯설고도 신선하다. 하지원은 관람객들에게 작품의 의미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구체적인 '긴 설명'은 하지 않았다. 느낌과 해석은 보는 이의 몫이라는 듯 간결한 멘트들이다.
배우들은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자신 외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작품 속 캐릭터, 가상의 인물에 집중해야 하는 배우라는 직업적 특성은 실제 세계와 타자에 집중할 여유를 부족하게 만든다. 타인을 관찰하는 일은 캐릭터의 성격과 직업을 표현하기 위한 일의 도구로만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 만큼 정서적 소모가 많은 일이 연기다.
기자는 하지원을 배우로만 만나봤다. 엔터계에서 하지원은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하고, 현장에서 게으름 피우지 않는 연기자로 평가 받는다. 여배우들이 꺼려하는 액션신도 직접 촬영하는 것으로 유명한 배우이기도 하다. 실제로 인터뷰이로 만난 하지원은 늘 배역에 몰두한 모습이었다. 배우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성향은 눈치채기 힘든 철저히 배우의 면모를 장착한 인터뷰이라는 뜻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작가, 화가 하지원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인간 하지원을 넘어, 인간 하지원이 바라 본 세계의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는 왜 보편의 사람들, 타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 '버츄얼 시리즈'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말 그대로 가상 세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대부분 부정적으로 표현하지만 (전) 희망을 갖고 싶었어요. 아무리 고립된 사람이라도, 어떻게든 사람과 연결되기 마련이에요.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거든요. 서로가 다르다는 다양성을 인정하면 가상의 세계에서 맺는 인간 관계도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갈등이 많은 요즘이잖아요. 사람이라는 존재는 살아가며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관계를 잘 끌어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해요. ('버츄얼 시리즈'는) 최근 그린 작품들인데, 그래서 아직 마르지 않은 작품도 있어요."
하지원은 코로나19 유행, 팬데믹을 기점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고 했다. 배우 하지원은 오직 앞만 보며 달렸고, 생각도 배우라는 정체성 안에 머물렀다. 때문에 인간 하지원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휴식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려 했다고 말했다. 성찰은 자연스럽게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코로나19 후 모든 촬영이 지연되면서, 뜻하지 않게 나를 돌아 보는 시간을 갖게 된 거죠. 힘든 시간이기도 했지만, 이전의 나와 달라진 계기가 됐어요. 배우 하지원이 아닌 인간 하지원에 대해, 그리고 나를 둘러싼 타인과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전시회 작품들은 그 고민과 생각의 표현들이에요."
그가 왜 직접 관객들과 만나는 지 알 수 있었다. 관객들, 타인들과의 만남은 깜짝 이벤트가 아닌 작품의 연상선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낯선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얼굴을 마주하던 그는 관객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원은 여러 작품들을 설명하며 4차 혁명, AI, 메타버스, 자본주의에 대해 언급했다. 최근 수 년간 그림을 그리며 관심을 가진 것들이다. 그는 '이제 아티스트네요'라는 누군가의 말에 "'아티스트'라고 말 할 수 있는 인물은 적어도 세상을 바꾸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다"며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같은 사람이 아티스트"라고 말했다.
전시회는 아래층에서 윗층으로 이어진다. 계단들 사이에서 하지원의 습작들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드로잉 작품들이 그간의 노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계단이 높아질수록 실력도 성숙해졌다.
5층은 절제된 2층과 달리 화려한 색감들로 가득하고 미래 지향적이다. 아무것도 없는 캔퍼스에 레이저 빔이 춤을 추 듯 비춰진다. 빔의 디자인도 하지원이 직접 디자인 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도 작품으로 활용한 점이 인상깊다. 빛과 빛들 사이에 작품이 있다. 어떤 작품은 누워서 관람하고, 어떤 작품은 앉아서 관람할 수 있어 흥미롭다. 자연광부터 인위적인 LED, 레이저까지 빛이라는 도구를 활용한 작품들이 눈에 띄는 공간이다. 자본주의를 풍자한 작품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작가 하지원의 눈은 자신을 넘어 타인과 세계를 향하고 있다. 보다 깊어지고 넓어진 그를 보니, 다음 전시회가 기대될 수 밖에. 자연스럽게 배우 하지원이 맞이할 제 2막도 궁금해진다. 화가 하지원은 배우 하지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P.S: 하지원 첫 번째 개인전 'INSTANT : THE BEGINNING OF A RELATIONSHIP'은 아트 스페이스 폴라포에서 오는 8월 17일까지 계속됩니다. 화~일, 11:00~18:00, 월요일 휴관,
[티브이데일리 김지현 기자 news@tv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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