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이효석문학상] 끊어내기 어려운 기억…과거와 결별할 수 있나
지혜 '북명 너머에서'
백화점 취직한 소녀가장
친했던 동료에 돈 떼여
중년에 그 시절 회상해
폐업하기 전까지 북명백화점은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이었다. 나이 23세 이성자는 백화점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북명백화점 양장점 레나타에 취직한다.
동네 사람들도 북명백화점 근무를 선호하던 때였다. 막내를 낳고 몸을 푼 지 얼마 되지 않은 엄마, 몇 달에 한 번씩 거지꼴을 하고 나타나는 아버지, 그리고 전교 1~2등을 다툴 만큼 공부를 잘하지만 대학에 가도 문제인 동생들. 북명백화점 취직은 성자의 최선이었다.
성자는 직장에서 언니 조옥을 만난다. 조옥은 1년 넘게 옷과 잡화를 판매한 베테랑이었다. 백화점 꼭대기 층 음악다방 에꼴드빠리를 오가며 두 사람은 빠르게 친해진다. 조옥이 클럽과 살롱에서 일한다는 소문까지 돌았지만 성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조옥이 성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다.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많이는 말고." 성자는 조옥이 말한 액수의 절반도 되지 않지만 자신에겐 결코 적지 않았던 생활비를 현금으로 건넨다. 가을이 돼도 조옥은 돈 갚을 기미가 없다. "언니, 돈 언제 줄 수 있어?"
이럴 때 대답은 언제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다. "응? 무슨 돈?"
지혜 작가의 단편 '북명 너머에서'는 이제 중년이 된 이성자 씨가 20년도 지난 오래전 그 시절 북명백화점에 근무하던 젊은 날을 회상하는 작품이다. 인간의 기억에 대해 사유하면서 과거 자신과 결별하고 또 화해하려는 작가의 힘을 담아낸 수작이다.
성자가 살던 동네에는 수상쩍은 구덩이가 하나 있었다. 여느 동네처럼 이 구덩이에도 전설이 하나쯤 있었다. 마을 여성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해 못 아래로 숨어든 이무기가 산다는 조금은 식상한 전설이었다. 그곳엔 지금 아파트가 들어섰다. 깊이 파였던 구덩이는 그러므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이다. 성자는 생각한다. "구덩이가 없어지면 이무기는 어떻게 되는가."
조옥을 기억하는 성자의 마음도 그와 같다. 성자에겐 차용증 없이 준 돈의 아쉬움보다 오직 조옥이란 사람을 알았다는 사실만 기억에 남았다. 성자는 오래된 기억이란 게 공기 중에 머물다 특정한 조건에 나타나는 화학 현상 같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장에도 밑줄을 긋게 된다.
'나는 그 구덩이를 사랑했다는 걸, 절망한 이무기와 이별과 실패한 오욕이 고인 빈 연못을 한없이 원했다는 걸 깨달았다.'
심사위원인 정이현 소설가는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계속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고 상찬했다.
박인성 평론가는 "클래식한 형태의 이야기임에도 강약 조절을 잘하면서 과거를 반추한다. 끊어내기 어렵지만 과거 자신과 결별하려는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심진경 평론가는 "오래전의 분위기가 주는 맛이 있다. 성자와 조옥의 호감과 애정이 있던 관계를 세련되게 풀어낸 점도 매우 돋보인다"고 덧붙였다.
1986년 제주에서 태어난 지혜 작가는 서울예대와 한신대에서 문예창작학을 공부했다. 201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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