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용 김치 국가명 표기 논란…무엇이 K-김치인가
지난달 21일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마곡은 1994년 용산·상암·뚝섬·여의도 등과 함께 서울시의 5대 거점으로 지정됐지만 서울시장이 바뀔 때마다 개발계획이 표류하면서 2009년에서야 기반 공사가 시작됐다. 지금은 그야말로 상전벽해.
경기 판교에 테크노밸리가 만들어진 것처럼 서울 마곡에는 K푸드밸리가 형성 중이다. 롯데의 식품 분야 연구개발(R&D) 인력이 모여 있는 롯데중앙연구소가 있고, 아워홈은 '마곡식품연구센터'와 함께 본사도 마곡에 자리 잡고 있다. 롯데중앙연구소 길 건너엔 대상 이노파크(Innopark)가 있다.
대상 이노파크엔 K푸드의 상징인 '김치'를 연구하는 '종가RPD 김치연구팀'이 있다. 대상은 우리나라 김치 업계 1위 업체다. 일반 소비자를 상대로 한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 김치 시장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또 수출용 김치 물량의 50~60%가 대상에서 만들어진다.
중국산 김치, '유통' 위해 아스파탐 사용
대상 종가RPD 김치연구팀을 찾은 것은 인공감미료 '아스파탐' 논란 때문이었다. 정부는 국내에 수입되는 중국산 김치의 84.5%가 아스파탐을 쓰고 있다고 발표했다. 아스파탐의 유해성에 관심이 쏠렸지만 유통 관점에선 중국산 김치가 아스파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더 흥미롭다.
김치 업계에 따르면 중국산 김치는 한국에 수출하기 위해 아스파탐을 넣는다고 한다. 통상 수출용 김치는 내수용보다 유통기간이 길어야 하는데 아스파탐은 단맛을 내기도 하지만 김치가 물러지는 것을 늦추는 효과가 있다. 국내 대기업은 김치에 아스파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면 한국에서 수출하는 김치는 어떻게 신선도를 유지할까? 국내 업소용 김치 시장을 중국산에 빼앗긴 한국 김치가 해외 시장은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 궁금했다.
김치 맛과 유통 '유산균'이 좌우
"김치는 가장 맛있게 익었을 때 pH 수치가 4.2~4.6을 나타냅니다. 이 산도를 유지하는 기간을 오래 가져가게 하는 '유산균'이 수출용 김치의 중요한 경쟁력입니다."
pH 수치는 1~14로 구분되며 1이면 강산성, 7이 중성(물), 14면 강알칼리성을 의미한다. 레몬 주스의 pH가 2~3, 와인 pH가 3~4다.
김성언 대상 종가RPD 김치연구팀 팀장은 한국 김치의 맛을 내고 유통기간을 늘리는 핵심 경쟁력으로 '유산균'을 꼽았다. 유산균은 토양에서 유래돼 김치의 원재료인 배추, 무, 파, 마늘 등의 원료에서 생존한다.
김치를 처음 담그면 유산균은 김치 내 다양한 미생물과 전투를 벌인다. 유산균은 원재료에 들어 있는 포도당, 과당, 양념으로 넣은 매실액, 물엿의 당분을 먹고 힘을 키운다. 당을 먹은 유산균은 발효 과정에서 단맛을 내는 만니톨, 신맛을 내는 젖산·초산, 시원한 탄산미를 주는 이산화탄소 등을 생성한다. 김치 맛은 원재료와 이들의 어우러짐이다.
김치를 처음 담글 때 유산균 수는 g당 10만마리 정도. 이 수는 김치가 숙성하면서 약 100억마리까지 늘어난다. 유산균을 세는 단위는 CFU(Colony-forming unit)이지만 편의상 '마리'로 표현한다. 김 팀장은 "숙성 김치 2~3조각을 먹으면 유산균 수백억 마리를 섭취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난다고 유산균 수가 무한정 계속 증가하는 것도 아니다. '묵은지'처럼 푹 익었을 때보다 적당히 익은 '적숙기'에 유산균량이 더 많다. 김치가 쉬고 산도가 올라가 pH 수치가 떨어지면 유산균 수치도 감소한다. 유산균이 공급되지 않으면 김치가 일찍 상한다. 결국 김치 맛을 최적화하는 소비기한은 유산균의 생명주기라고도 볼 수 있다.
대상은 김치의 맛있는 기간을 늘리는 유산균 연구에 나섰고 2017년 '류코노스톡 메센테로이데스 종가집김치아이'란 이름의 김치생산종균에 대해 특허를 출원했다. 지금도 이 유산균을 사용하고 있다. 김 팀장은 "김치 맛을 잘 내고 오래 살 수 있는 힘이 좋은 유산균을 찾는 게 우주에서 새로운 별을 발견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는 '김치'를 '코리안 스파이시 피클'로 설명한다. 하지만 김치는 피클과 같은 절임식품과는 구별된다. 절임류는 '장기 보관'이 목적이다. 절임식품은 소금에 오랜 기간 절이면 유익균인 유산균까지 사멸시킨다. 일본 '기무치'에 유산균이 없는 이유다. 김치도 소금에 절이지만 김치의 절임은 유산균 발효를 위한 전처리 단계 정도로 보면 된다. 유산균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수준이다.
국내에선 정책 혼선이 '패착'
지난해 우리나라는 김치 무역수지 2858만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수입 김치는 대부분 중국산이다. 2021년엔 중국 김치공장의 '알몸 절임배추' 동영상 파동으로 수입량이 줄었다.
이하연 대한민국김치협회장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이 식당에서 수입산 김치를 먹게 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김치를 무료로 무한 제공하는 한 식당에선 수입산 김치를 쓸 수밖에 없다"면서도 "김치는 한국의 대표 이미지인데 수입산 김치에선 김치 종주국의 품격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식당 등 업소용 김치 시장을 중국산 김치가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치 업계를 추가로 취재해봤다. 김치를 만들기 위한 배추, 무, 소금, 고춧가루 등 한국산 농산물의 가격 경쟁력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업계에선 중국산 김치 가격을 한국산의 6분의 1 이하로 본다. 김치의 원재료인 배추는 한국산을 쓰더라도 고춧가루는 중국산을 쓰는 곳도 많다.
중국산 김치가 업소용 김치 시장을 점령한 데는 정부의 '규제'도 역할을 했다.
김치는 2011년 '중소기업 적합업종'에 지정됐다. 대기업이 업소용 김치 시장에 진출할 길이 막힌 것이다. 2018년 관련 규제는 해제됐지만 이미 김치 시장 대부분을 중국산 김치가 차지해버렸다. 국내 중소기업은 외식을 제외한 급식이나 군납 등에 납품하는 상황이다. 정부 규제가 엉뚱하게 중국산에 국내 시장을 내줬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김치 시장엔 이미 대상, CJ제일제당, 풀무원 등 국내 대형 식품기업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이 농가와 '상생모델'을 만들어 계약재배를 통해 국산 농수산물의 수급을 안정화하고 공장 자동화 등의 방법으로 생산원가를 낮췄다면 국내 업소용 김치 시장도 지킬 수 있었다.
김치가 '적합업종'으로 묶이면서 대기업이 안정적인 가격으로 국산 원재료를 수급하기 위한 생태계를 조성할 '골든타임'을 놓쳐 버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명 지리적 표시제 논란
정부는 김치를 놓고 또 다른 시험대에 올라서 있다. 이번엔 해외 시장이다. 정부는 수출용 김치에 대한 '국가명 지리적 표시제(NGI)' 도입을 검토 중이다. 우리 방식으로 제조한 김치에만 '한국 김치(Korean Kimchi)' 표기를 할 수 있도록 해 외국산 김치와 차별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번엔 고춧가루가 쟁점이다. 김치 생산 업체들은 수출용 김치에 중국산 고춧가루를 써도 '한국 김치' 표기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치산업진흥법에 따라 수출용 김치엔 김치 제품의 특성을 나타내는 주원료 세 가지가 국산이면 '대한민국 김치'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량 기준으로 김치 주원료는 배추, 무, 천일염 다음이 고춧가루다.
중국은 고추 생산량 세계 1위 국가다. 재배면적이 한국의 30배 수준이다. 가격 경쟁은 힘들다. 국산 고추는 해마다 수확량과 가격 편차가 심하다는 문제도 있다. 또 일부 국산 고춧가루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금지한 농약 성분이 있어 미국 수출이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반면 국내 고추 생산 농가는 "중국산 고춧가루를 쓴 김치가 어떻게 한국 김치가 될 수 있느냐"며 반대하고 있다.
'한국 김치'의 기준을 너무 낮추면 중국산 김치가 '원가 경쟁력'을 앞세워 한국 시장뿐 아니라 미국·유럽 시장을 점령할 가능성도 크다. 한국이 열심히 전 세계에 '김치의 날'을 만들어 놓아도 중국산 저가 김치가 시장을 빠르게 잠식할 수 있다. 외국 사례를 살펴보자.
프랑스 와인 업계는 '테루아' 개념을 강조해 미국, 칠레, 호주 등지에서 만들어지는 저가 와인과 차별화하고 있다.
테루아란 포도가 자라는 땅과 기후 등 와인의 생산 환경을 강조한 것이다. 원산지 규정도 까다롭게 적용해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규정을 지켜 만든 스파클링 와인만 '샴페인'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반면 이탈리아 나폴리 피자는 만드는 방식만 같으면 해외에서 만들어도 '나폴리'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
프랑스 국민 식품인 바게트의 경우 프랑스에서 판매하는 '바게트'는 무조건 프랑스산 밀가루를 쓰도록 의무화해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 대신 가격이 비싸져 소비자의 불만이 생기지 않도록 바게트 가격을 통제한다. 하지만 해외에서 만드는 바게트까지 원재료 규제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한국 SPC그룹이 운영하는 베이커리 브랜드 파리바게뜨는 미국 맨해튼에서도, 한국 서울에서도 바게트를 만들지만 미국·캐나다산 밀가루를 사용한다.
국산 농수산물 K푸드 공급망 '붕괴'
정부는 2027년까지 농식품 수출액 150억달러, 국산 원료 사용량 800만t 달성을 목표로 K푸드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K라면과 K만두를 수출한다고 해서 국산 농산물 수출이 덩달아 늘어날지는 미지수다. 예를 들어 라면과 만두에 쓰이는 밀가루는 거의 미국과 호주에서 들여온 수입산이다. 수출 유망품인 K소스도 마찬가지다. 고추장 원료의 85%가 수입산이다. 고추장의 34%를 차지하는 물엿의 수입 비중은 94%에 달한다. 물엿은 고추장뿐 아니라 된장, 쌈장, 간장 등 K소스에 두루 쓰인다.
식품 업계 관계자는 "국산 농수산물 공급망이 구축돼 있지 않으면 K푸드 수출이 늘어도 이에 따른 국산 농수산물 소비 증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면서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국내 농가의 현실을 무시한 채 국산 원재료 사용만 고집하면 K푸드 세계화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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