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이사나갈 수도 없는데…” 철근 누락 이후 고민 깊어진 임대아파트

심윤지 기자 2023. 8. 2. 15:3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설명회 한다고 안내 방송은 여러차례 나왔는데 안갔어요. 나같이 나이든 사람이 가서 할 말도 없고, 당장 이사를 갈수도 없는 노릇이고…”
- 80대 입주민 A씨

지난 1일 경기도 파주시 파주운정A34블록 아파트는 전날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철근 누락’ 사실이 발표된 후로도 상대적으로 잠잠한 분위기였다. 이날 기자가 만난 입주민들은 대부분이 75세 이상 고령이었다. 전날 LH에서 연 긴급주민설명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했다.

신혼부부나 노부모 부양자 등 젊은 임차인들끼리는 단체카톡방을 소통 창구로 활용하고 있지만 이 역시 ‘공동 대응’으로 보기엔 한계가 있었다. B씨(50)는 “LH 설명에 실망이나 불안을 표하는 반응이 주”라면서도 “입주자 대표를 선출하는 움직임은 아직 없고, 대체로 관리사무소와 1:1로 소통하려는 분위기”라고 했다.

LH는 철근 누락이 확인된 아파트 15곳에 대해 입주민과의 협의를 거쳐 보강작업과 보상논의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15곳 중 10곳을 차지하는 임대아파트의 경우 입주민들이 한데 모여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구조라는 지적이 나온다.

다른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기 힘든 저소득 고령자가 많고, 자가주택이 아니다보니 상대적으로 재산권에 대한 관심도 낮다는 것이다. 남양주 별내 등 분양 단지들이 입주자대표회의를 중심으로 LH 보강공사안에 대한 구조검토, 집단소송 등을 논의하며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선 것과 대조적이다.

경기도 파주시의 한 아파트 지하추자장에서 1일 관계자들이 가림막을 쳐 놓고 기둥의 철골 보강공사를 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지난해 8월 입주를 시작한 파주 운정 A34BL 아파트는 영구임대주택 241가구와 행복주택 1207가구 등 총 1448가구로 구성됐다. 입주민 대부분은 노인·장애인 등 주거취약계층이다. 행복주택을 포함하면 공실률은 약 절반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보니 입주 1년이 넘도록 동대표조차 선출하지 못한 상태다.

입주민들은 LH의 철근 누락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안내를 듣지 못했다. LH는 단지 내 무량판 공법으로 지어진 지하주차장 기둥 331개 중 12곳의 전단보강근이 누락된 사실을 파악했고, 지난 7월부터 슬라브 보완 공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는 ‘도색 작업’을 하고 있다고 속여 논란이 됐다.

경기도 파주시의 한 아파트 지하추자장에서 1일 관계자들이 가림막을 쳐 놓고 기둥의 철골 보강공사를 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이에 LH 관계자는 “누락 철근 갯수도 적고 공사가 크지 않은데 주민 불안이 커질까봐 내린 조치”였다고 해명했다. 분양 단지는 입주자대표회의가 꾸려진 곳들이 많아 사전 소통이 가능했으나, 임대 단지는 임차인대표회의가 따로 없어 ‘선공사 후설명’이 불가피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입주민들은 안전과 직결되는 공사를 진행하면서 제대로 된 안내조차 없었다는데 분노가 컸다. 입주민 C씨(72)는 “보강공사를 진행한다면서 안전펜스조차 치지 않은게 말이 되느냐”며 “언론이 취재를 시작하니 당일에 부랴부랴 면피용 설명회를 연 것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집단소송이나 재시공 요구 등 향후 대응을 두고서는 입주민들의 의견이 갈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입주민들은 LH의 임대아파트 관리 소홀로 입주자들이 좀처럼 모이지 않고, 입주자들이 모이지 않으니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악순환이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철근 누락 아파트 중 한곳으로 알려진 파주 운정의 한 아파트단지는 입주 1년이 넘게 작은도서관, 피트니스센터 등 커뮤니티 시설이 모두 공실로 남아있었다. 심윤지 기자

C씨는 “입주 때 약속한 커뮤니티시설은 1년 넘게 공실이고, 교통·편의시설 인프라도 제대로 갖춰져있지 않다보니 젊은 사람들은 금방 나가고 나이든 사람들만 남게 된다”며 “LH에 관련 민원을 넣으려 해도 1년 넘게 ‘전화 뺑뺑이’만 돌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보강공사라고 다를까 싶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임대주택에서 발생한 중대한 하자가 발생해도, 임차인들이 LH에 이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소유자들이 중심이 된 입주자대표회의는 아파트 관리에 있어 여러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반면 임차인대표회의는 그렇지 않다”며 “임대주택 입주자들로선 하자 관리 책임을 LH에 전적으로 맡겨둘 수 밖에 없는 상황”고 말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