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죽음’을 재촉하는 나라 [김영희 칼럼]
김영희 | 편집인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한 출판사 대표의 글을 읽었다. 이름이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저의 직업은 출판제조업입니다. 고백하자면 실패한 제조업자입니다. 쌓여 있는 것은 파주 도서 물류회사에서 독자를 기다리는 책이 전부입니다. 출판사 이름을 논형이라 명명하고 300여종을 펴냈습니다. 이름값에도 미치지 못한 점이 많습니다만 일독으로 응원을 청합니다. 추신: 페친님의 너른 이해를 바랍니다.”
십수년차 실력 있는 편집자로 출판동네에 알려졌던 소재두씨는 2003년 ‘논리의 저울’, 즉 균형 잡힌 문장을 뜻하는 이름을 붙인 출판사를 냈다. ‘건건록’ 등 깊이 있는 일본 역사 관련 분야나 한-일 관계 서적을 다수 출간하며 작지만 전문성 있는 학술 출판사로 알려져왔다.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20년을 버텨왔을 그의 쓸쓸한 글이 요즘 출판계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달 24일 ‘케이-북, 케이-출판 재도약 실천의 진행상황 및 계획’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제목만 보면 출판계 지원 방향 발표인가 싶겠지만, 핵심은 정부 보조금이 투여되는 서울국제도서전의 운영 문제와 주최 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에 대한 공격이었다. 두쪽짜리 장관 발언 요지에는 “한심한 탈선 형태” “이권 카르텔” “충격적 의혹” 같은 자극적 단어가 가득했다. 규칙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고 아직 감사 중인 사안인데 장관이 느닷없이 간담회를 자청해 의혹을 기정사실화한 건 분명 이례적이다. 출협이 성명서를 내며 강력하게 반발하자 민간단체 회장 이름을 콕 찍어 맹비난하는 보도자료를 내는 모양새도 정부 부처답지 않은 대응이다. 설사 문제가 있더라도 감사 뒤 개선안을 마련해 밝히면 될 일이다.
지난 6월 초 ‘케이-북 비전 선포식’을 열었던 문화행정 수장의 최우선 과제가 고작 출판계 몰아세우기인가. 대통령의 발언 이후 각 분야 ‘이권 카르텔’ 발굴 경쟁이 치열하다더니 이젠 장관이 존재감을 높이려 출판계까지 끌어들이냐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이 그럴 땐가. 지표가 심상찮다. 출협에 납본하는 출간 종수는 지난해 6만1천종으로 그 전해에 비해 4천종 줄어들며 2018년 수준으로 퇴보했다. 평균 초판부수는 2018년의 절반을 조금 웃돈다. 독자 관심의 다양화에 따라 ‘다품종 소량생산’ 추세가 나타난 지는 오래지만, 이젠 “부수도 종수도 다 줄고, 밀려난 편집자가 출판사를 차려 출판사 숫자만 늘어나는 이상 동향”(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이 정착하고 있다.
중소규모의 학술·과학, 대학교재 출판사들은 특히 직격탄을 맞고 있다. 2022년 현재 한국의 일반 공공도서관이 1100여곳인데 마땅히 주목할 학술서가 나와도 도서관이 구입하는 분량은 100~200권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출판사들에 그나마 단비 같던 국가의 ‘세종도서’ 선정·구입지원 사업을 비롯해 문학나눔 사업 등을 문체부는 올 들어 잇달아 흔들었다. ‘블랙리스트’의 기억이 생생한 출판계에선 정부가 출판사들을 진보 담론의 생산기지로 보며 이 기회에 고사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올 정도다. 오는 17일 출협 주최로 출판 위기 타개를 위한 정부의 지원을 촉구하는 범출판계 집회가 예고된 가운데, 또 다른 단체인 출판인회의도 정부의 콘텐츠 사업 지원에서 출판만 배제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출판인들과의 간담회를 요구했다. 출판사·단체의 성향이나 규모와 관련 없이 위기의식이 팽배하다는 방증이다.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겠다. 종이책을 읽지 않는 시대 아니냐고. 여전히 베스트셀러도 나오는데 독자들 니즈를 맞추지 못한 출판사가 문제지 왜 정부가 지원해야 하냐고. 하지만 한 나라의 지식산업의 수준은 그 나라의 국력과 그 사회의 민주주의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좌든 우든 책은 사상의 거처이고 한 사회의 미래를 보여주는 척도다. 책이 단순히 시장소비재라면, 문체부가 1947년부터 출협이 열어온 도서전을 지금까지 후원해올 이유가 없다.
얼마 전 통화한 소재두 대표는 자신의 경영 능력 탓을 하면서도 한국 사회에 대한 절망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고민을 토론하는 게 30년 정도는 축적이 되어야 뿌리를 내릴 수 있는데, 모든 게 끊겼다. 대학에서 교양 강의가 죽고, 학문 후속세대 연결엔 실패했고, 지식인은 파편화됐다.” 인쇄소·제본소에 돈을 제때 주지 못하는 게 ‘민폐’ 같아 올해 한권의 책도 내지 않았다는 그는 요즘 완성된 원고를 들고도 선뜻 인쇄에 들어갈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입시경쟁과 서열화된 사회 구조, 대학 연구환경의 몰락 등이 구조적으로 얽혀있는 출판계 위기를 단칼에 해결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출판인들과 정부가 머리를 맞대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이 순간도 편집자들의 구조조정과 이직이 한창이다. 한 편집자는 “이렇게 2~3년만 지나면 한국 철학자의 책을 낼 수 있는 출판사가 아예 소멸할 것”이라고 말했다. 책이 죽어가고 있다. 지식산업의 실핏줄이 끊겨가고 있다. 문체부가 ‘이권 카르텔’ 때려잡기나 할 때가 아니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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