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 美 신용등급 강등에…“시장 영향 제한적” VS “로마도 하루에 안 무너져”
옐런 “피치, 자의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져”
세계 3대 신용평가사 피치가 미국 신용등급을 기존 최고등급인 AAA에서 AA+로 한 단계 강등했다. 4경 원을 훌쩍 넘긴 미 부채와 반복되는 정치 리스크를 강등 이유로 들었다. 세계 최대 경제 대국 미국 신용등급이 하락한 것은 역시 미 부채 상한 교착 상태에 빠졌던 2011년 이후 12년 만이다.
피치는 1일(현지시간) 성명에서 “미 신용등급 강등은 향후 3년 동안 재정 악화가 예상될 뿐 아니라 지난 20년 동안 부채 상한에 대한 반복되는 교착상태, 관리 능력 악화 때문”이라고 밝혔다.
미 뉴욕증시 마감 후 발표된 신용듭급 하락에 뉴욕 증시 선물은 소폭 하락했고, 3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지난해 11월 수준으로 상승했다. 2일 개장한 아시아 시장은 하락폭을 키우고 있다. 코스피가 장중 1.4%대 하락세를 보이는 가운데 일본 니케이 지수와 홍콩 항셍지수는 2% 까지 내림세를 이어가고 있다.
● 피치 “20년 동안 재정 관리 악화”
피치의 신용등급 강등 이유는 미 재정 악화다. 피치는 “2025년 1월까지 부채 한도를 유예하기로 한 지난 6월의 초당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재정과 부채 문제가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미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가 2022년 3.7%였다면 2025년 6.9%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며 부채 부담 증가에 따라 내년 경기침체 우려도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미 부채는 31조 달러(4경126조4000억 원)를 넘겼다.
백악관과 재무부는 강도 높게 피치의 결정을 반박했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피치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시절에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피치는) 자의적인데다 한물 간 데이터를 기반해 미국 신용을 강등시켰다”고 비판했다. 커린 잔 피에르 백악 대변인은 피치 보고서가 “미 경제 회복이라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피치는 미 부채 상한 대치로 사상 최초 디폴트(채무불이행) 우려가 커지던 5월 말 미국을
‘부정적 관찰 대상’으로 옮겨 강등 가능성을 예고한 바 있다. 하지만 백악관과 공화당이 상한에 합의 한 지 두 달이 지났고, 미 경제 연착륙 기대감이 커지고 있던 터라 이번 신용등급은 다소 갑작스럽다는 분위기다.
래리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은 “미국이 장기적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것은 맞지만 미 경제가 예상보다 강한 현시점에 신용등급을 내린 것은 기이하고(bizarre) 무능하다(inept)”고 밝혔다.
●“시장 영향 미비” VS “로마도 서서히 무너져”
2011년 8월 또 다른 글로벌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미 부채 벼랑끝 대치 위험성을 경고하며 미 신용등급을 AAA로 강등한데 이어 12년 만에 피치도 동참함에 따라 3대 신용평가사 무디스만 미국에 대해 최고등급을 유지하게 됐다.
글로벌 기관 투자자들은 신용등급에 기반해 채권의 가격을 책정한다. 신용등급 하락은 빚을 갚을 능력이 떨어졌다는 의미라 채권 금리는 오르는 경향이 있다. 미국 국채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주택 대출 금리를 비롯해 시장 주요 자산 금리 산정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신용등급 강등으로 미 국채 변동성이 커진다면 세계 금융시장에 후폭풍을 몰고 올 수 있다. 2011년 S&P가 최초로 미 신용등급을 강등했을 때, 일주일 여 동안 미 증시는 15% 폭락했고 더불어 코스피도 17% 떨어졌다. 당시는 금융위기 이후 유럽 재정위기를 비롯해 세계 경제가 불안하던 시기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 타격이 더 컸다. 세계경제 혼란으로 오히려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커져 오히려 미 국채 금리가 떨어지고 달러가 강세를 보였다.
이번에는 첫 강등도 아닌데다 미 경제가 회복세에 있고, 기업 실적도 상승세를 보이고 있어 영향이 미비할 것이란 시각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모하메드 엘 에리안 전 핌코 최고경영자(CEO) 및 영국 캠브리지대 퀸스 칼리지 총장은 “발표 타이밍 뿐 아니라 많은 면에서 이번 강등은 의아하다”며 “미 경제나 시장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실제 피치 발표 후 뉴욕증시 선물은 0.3% 안팎의 소폭 하락에 그쳤다.
반면 미 국채에 대한 경고로 봐야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2011년에는 사실상 제로금리 수준이던 미 국채 금리가 이번에는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고강도 긴축으로 4% 안팎으로 이미 올라와 있다. 팬데믹 이후 미 국채 과잉 공급으로 시장의 피로감도 높아져 있다. 전날 미 재무부는 3분기(7~9월)에 시장 예상보다 2500억 달러 높은 1조 달러(1288조 원) 규모 자금을 더 빌리겠다고 해 바클레이는 “국채 쓰나미가 몰려온다”고 지적했다. 누가 계속해서 국채를 사줄 수 있느냐는 의문이다.
미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일본, 그 다음으로 많은 중국발 불확실성 요인도 있다. 일본이 실제 금리를 인상하면 투자자들은 미 국채를 팔고 일본 국채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아진다. 중국은 미중 갈등 속에 미 국채를 팔고 있다.
윌밍턴 트러스트의 루크 틸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당장 투자자들이 미 국채 의존도를 줄이진 않겠지만 신용등급 강등이 미 정부의 신뢰도도 떨어뜨린다”며 “로마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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