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위기, 괴담이 삼킨 ‘탈진실 사회’
정부 정책에 대해 야당은 “거짓말”로 몰아붙이고, 여당은 이를 “괴담”이라고 비난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국민의힘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은 입만 열면 ‘괴담’을 선동하며 국민을 현혹시키고 있다. 민주당에 따르면 정부와 여당은 국민을 속이며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서울~양평 간 고속도로 건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안에서 정부·여당과 국회 다수당인 야당의 주장이 대치하는 양상은 똑같다.
국민은 누구를 믿어야 할까. 혼란스럽다. 차라리 아무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 다수 국민의 심정일 것이다. 국민감정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의 ‘2023 세계 번영지수’를 분석한 한국경제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각국 기관 신뢰도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한참 하위권이다.
전체적인 ‘기관신뢰도’는 조사 대상 167개국 중 100위다. 세부 항목에선 정부 111위, 정치인 114위, 사법 시스템 155위, 군 132위 등 하위권이었다. 정부 정책 투명성은 104위였다.
‘레가툼 세계 번영지수’는 경제, 기업 환경, 국가경영, 교육, 보건, 안전·안보, 개인의 자유, 사회적 자본, 자연환경 등 9가지 지표를 기준으로 각국의 점수와 순위를 매긴다. 2023 레가툼 지수에서 한국은 종합 29위였다. 결국 행정·입법·사법 신뢰도는 우리 사회의 평균 발전 수준에 크게 못 미치는, 꼴찌 수준의 ‘낙제 분야’인 것이다.
이는 정부 정책도, 의회의 입법도, 정당의 주장도, 검찰·경찰의 수사도, 법원의 판결도 우리 국민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적 기관에 대한 신뢰가 약하다는 말은 권력에 의해 공인된 언어와 주장된 ‘사실’이 국민에게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권력기관의 통치행위가 국민의 요구와 이해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할 때 그 이면에 누군가의 사익이나 정치적인 음모 따위가 개입됐을 것이라고 국민은 의심한다. 국민의 의견이 권력기관에 수용되지 않을 때 ‘합리적 문제 제기’는 공론의 장에서 벗어나 대중을 현혹해 권력을 얻고자 하는 ‘정치적 자영업자’와 선정적인 거짓을 팔아 돈을 버는 온라인의 ‘신흥 약장수’의 먹잇감이 된다.
권력에 대한 신뢰가 붕괴된 사회는 괴담과 가짜 뉴스가 배양되는 토양이다. 권력에 대한 불신에 더해 정치 양극화는 괴담과 가짜 뉴스를 한 사회를 삼켜버릴 수 있는 거대한 괴물로 키운다. 괴담과 가짜 뉴스는 표가 되고 돈이 된다. 불신과 정치 양극화, 괴담과 가짜 뉴스는 서로를 자양분으로 삼는다. 합리적 공론의 장이 기능하지 않는 사회에서 강압적으로 배제된 문제 제기는 ‘합리성’을 잃고 괴담과 가짜 뉴스의 씨앗이 된다.
국내에서 조사한 ‘기관 신뢰도’ 역시 권력기관에 대한 믿음이 높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행정연구원이 해마다 발표하는 ‘사회통합 실태조사’ 중 기관 신뢰도다. 이는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 주요 공공·민간기관이 맡은 일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지에 대해 ‘약간 믿는다’ 또는 ‘매우 믿는다’라고 응답한 사람들의 비율(%)을 나타낸다. 이에 따르면 가장 최근인 2022년 조사에서 행정·사법·입법 분야의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도는 50 이하였다. 세부적으로 중앙정부 부처 50.0, 검찰 45.2, 경찰 49.6, 법원 47.7이었다. 특히 국회는 24.1로, 최하위였다.
국민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고 개인·집단 간 갈등을 조정하는 국가의 통치행위에 대해 신뢰·만족하는 이들이 전체의 절반도 안 된다는 뜻이다. 그중에서도 국민이 스스로 뽑아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인 국회에 대해선 극단에 가까운 불신이 나타났다. 사회 갈등과 통합에 관련된 민간기관인 언론, 시민단체, 종교계 역시 신뢰도가 크게 높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반면 국민 실생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더 기능적인 기관’에 대해선 신뢰도가 높은 편이었다. 의료계 76.4, 교육계 67.7, 금융기관 67.1, 대기업 57.6 등이다. 영국 레가툼 지수나 한국행정연구원의 사회통합 실태조사의 각종 지표가 보여주는 바는 같다. 정부의 정책은 국민을 위하지 않고, 검·경 수사와 법원 판결은 국민감정과 거리가 멀며, 국회와 정당은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통치가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민주주의가 실패한 곳, 정치가 실패한 곳, 공권력이 실패한 곳에서 자라나는 것이 괴담과 가짜 뉴스다.
사회학자 전상진 교수(서강대 사회학과)의 저서 ‘음모론의 시대’는 ‘사람들은 왜 음모론에 매혹되는가’와 ‘정치가들은 왜 음모론을 이용하는가’에 대해 논의를 펼친다. 여기서 음모론은 괴담이나 가짜 뉴스가 의미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련의 괴담이나 가짜 뉴스가 일관된 논리 체계를 갖추면 음모론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이론에 따르면 음모론은 기대와 현실 간 간극에서 비롯된 불공정, 불만족, 부정의, 불평등으로부터 생긴다. 자신의 행동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고통을 유발하며, 고통은 설명돼야 한다. 기대와 현실, 행동과 결과의 불일치에서 오는 고통을 극단적인 논리성과 합리성으로 설명하려는 의미 체계가 바로 음모론이다. 막스 베버의 용어를 빌리자면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설명하는 것이 ‘신정론’인데 음모론은 모든 복잡한 현상의 탓을 단 하나의 원인으로 귀착시키는 세속적 신정론인 셈이다. 여기서 단 하나의 원인이 바로 음모집단이며 절대악이고 응징해야 할 죄인이다. 권력기관이 공인한 언어와 사실이 불투명하고 불합리하며 현실성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할 때 국민은 ‘이면의 진실’을 찾게 된다. 이때 대중을 현혹하는 것이 음모론, 곧 괴담과 가짜 뉴스인 것이다.
음모론은 단순하고 명확하며 극단적으로 논리·합리적이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또 음모론은 강자의 통치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약자의 저항무기도 될 수 있다. 책은 “음모론은 현대정치의 중요한 전략이자 자원이 되었다. 지지자 동원에 효과적이고 정적 공격에 유용하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하는 데 쓸모를 지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집권세력은 통치행위에 대한 모든 문제 제기를 ‘체제 전복의 음모’로 귀결시킨다. 이에 맞서 정권 교체를 노리는 세력은 사회의 모든 문제를 국민을 기만하는 권력자들의 부패와 범죄로 몰아간다. 어느 정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정치의 행태도 이로부터 거리가 멀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정치의 양극화는 괴담과 가짜 뉴스의 생산과 유통, 확대재생산을 가속화했다. 갈등과 분열은 괴담과 가짜 뉴스를 낳고, 괴담과 가짜 뉴스는 정치적 양극화를 강화하는 악의 되먹임 구조가 만들어진다.
급기야는 지금 시대가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고, ‘믿음’이 ‘사실’을 대체하는 ‘탈진실(post truth)의 시대’라는 진단까지 나왔다. 2016년 옥스퍼드사전은 세계의 단어로 ‘탈진실’을 선정하며 탈진실화가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실제 일어난 일보다 개인적인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뜻으로, 괴담과 가짜 뉴스가 만연한 오늘날의 세계를 한 단어로 압축한 것이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유명한 대사 중 하나는 “예술가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을 사용하지만 정치인은 진실을 덮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공화국의 위기’에 실린 논문 ‘정치에서의 거짓말’에서 국가적 수준에서 이뤄지는 ‘정치의 거짓말’을 분석한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국가적 수준의 거짓말이란 인간의 범죄적 특성에 의해 우연히 정치로 흘러간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을 지탱하는 사실의 망 자체가 거짓, 그러니까 괴담과 가짜 뉴스, 음모론에 취약하다. 이 거짓말들은 종종 현실보다 더 그럴듯하며 이성에 더 호소력을 갖는다. 왜냐하면 거짓말쟁이는 자신의 거짓말을 듣게 될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이나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사전에 알고 있다는 큰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권력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통치 대상들이 원하는 바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를 갖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의 거짓’을 더욱 능통하게 할 수 있는 ‘최신의 방법’들로 권력기관의 홍보담당관과 ‘문제해결사’라고 불리는 전문가들-이를테면 각종 싱크탱크-을 꼽았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의 저서 ‘공화국의 위기’가 발표된 시점이 1960년대 말이다. 세기가 바뀐 지금에 와서 다시 ‘최신의 방법’들을 꼽자면 각종 소셜미디어(SNS)나 인공지능(AI) 등이 더 주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제 괴담과 가짜 뉴스는 새로운 숙주를 찾았다. 속도와 규모에서 전에 없던 파급력을 가지는 첨단 플랫폼이다.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에서는 AI나 SNS에서 창궐한 괴담과 가짜 뉴스가 국가적 선거나 정책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할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소비자들에게 사기를 부추기고 시장의 경쟁을 제한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됐다.
그러나 AI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정보를 ‘재구성’하고, SNS는 인간이 만들어낸 정보를 실어 나를 뿐이다. 다만 전례 없는 규모와 속도, 파괴력으로 말이다. 첨단 플랫폼의 활용과 규제는 여전히 인류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만 그 이전에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괴담과 가짜 뉴스가 발붙일 수 없고 흔들 수 없는 강한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권력의 통치행위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고, 다양한 의견의 합리적 소통이 가능한 공론의 장을 만들며, 정치적 양극화를 깨뜨리는 일 말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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