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카페] 세계를 떠돌던 불멸의 세포, 72년 만에 보상받다
”동의 없이 채취·배양한 암세포로 수조원 이득”
앞서 세포 사용한 대형 연구기관도 수억원 기부
내 허락도 없이 신체 일부가 팔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섯 아이의 어머니였던 흑인 여성 헨리에타 랙스(Henrietta Lacks) )는 1951년 자궁경부암으로 31세에 사망했다. 당시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 의료진은 그에게서 암세포를 채취해 실험실에서 무한 증식했고, 그 세포가 지금까지 각종 의학 연구에 활용됐다.
전 세계 실험실을 떠돌던 ‘불멸의 세포’가 72년 만에 법적 권리를 되찾았다. 헨리에타 랙스 유족은 지난 1일(현지 시각) 고인(故人)의 사망 전에 채취한 암세포를 배양해 전 세계 실험실에 판매했던 써모 피셔 사이언티픽(Thermo Fisher Scientific)과 소송에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날은 헨리에타 랙스의 103번째 생일이었다. 손자인 알프레드 랙스 카터 주니어(Alfred Lacks Carter Jr)는 “할머니를 위해 정의를 실현하고 가족들이 안도할 수 있는 이보다 더 적절한 날은 없었을 것”이라며 “”70년이 넘는 긴 싸움이었지만 헨리에타 랙스는 마침내 승리했다”고 말했다.
◇합의 내용은 비밀, 유사 소송 이어질 듯
헨리에타 랙스의 이름과 성에서 각각 두 글자를 딴 헬라(HeLa) 세포는 인류가 실험실에서 배양한 첫 번째 불멸의 인간 세포이다. 그동안 소아마비 백신과 항암제부터 최근 코로나 19 백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의학 혁신에 이바지했지만, 세포 채취와 배양 과정에서 랙스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 누구에게도 동의를 받지 않았다.
랙스 유족은 2021년 메릴랜드주 지방법원에 제기한 소송에서 써모 피셔 사이언티픽이 헬라 세포 판매로 수조원을 벌어들였지만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써모 피셔 측은 소송이 공소시효가 만료된 후에 제기됐기 때문에 기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렉스 가족의 변호사는 회사가 지속해서 이익을 얻고 있어 공소시효가 적용돼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양측의 변호사는 이날 같은 내용으로 발표한 성명에서 “합의 조건은 기밀”이라며 “양측은 법정 밖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더는 이 사안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날 기자 회견에서 랙스 유족의 변호사 중 한 명인 크리스 에어스(Chris Ayers,)는 “비슷한 소송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헬라 세포의 매우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인 역사와 기원을 통해 이익을 얻고, 이익을 얻기로 선택한 사람들과 싸움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랙스의 세포를 채취했던 존스 홉킨스 의대는 윤리적 책임을 인정하지만, 병원이 헬라 세포를 판매하거나 이익을 얻은 적이 없으며 헬라 세포주에 대한 권리도 소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많은 회사가 헬라 세포 사용법에 대해 특허권을 받았다.
◇2020년 연구기관도 수억원 기부로 보상
랙스의 후손들은 2021년 소장에서 “그녀에 대한 치료는 오늘날에도 지속하고 있는 훨씬 더 큰 문제인 미국 의료 시스템 내부의 인종 차별을 보여준다”며 “헨리에타 랙스에 대한 착취는 불행히도 흑인들이 역사적으로 겪어온 일상적인 고투를 보여준다”고 밝혔다.
랙스는 버지니아주 남부에서 담배 농사를 짓던 흑인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볼티모어시 외곽 흑인 거주지역으로 이사해 다섯 아이를 낳고 키우다가 자궁경부암에 걸렸다. 랙스는 존스 홉킨스 병원의 유색인종 병동에서 사망하고 무연고 무덤에 묻혔다.
그전까지 사람 몸에서 채취한 세포는 실험실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지만, 랙스의 암세포는 계속 살아남아 증식했다. 과학자들은 헬라 세포로 수많은 과학과 의학의 혁신을 이뤘다. 각종 치료제 개발은 물론, 노화의 비밀을 밝히는 데에도 기여했다.
일반 세포와 달리 헬라 세포는 세포 분열을 해도 염색체 끝 부분인 텔로미어(telomere)가 줄어들지 않는다.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텔로미어가 세포분열에서 유전자를 보호하는 일종의 쿠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아가 텔로미어를 유지하게 해주는 효소를 찾아내 이를 통해 노화를 방지하는 방법도 연구하고 있다.
랙스와 헬라 세포의 이야기는 2010년 출간된 레베카 스클로트(Rebecca Skloot)의 베스트셀러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책에 따르면 랙스의 가족은 1973년에야 세상을 바꾼 헬라 세포의 존재를 알았다. 세계적인 방송 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는 이 책을 기반으로 만든 HBO 영화에서 랙스의 딸을 연기했다.
앞서 랙스 유족은 헬라 세포를 사용한 연구기관으로부터 처음으로 보상을 받았다. 지난 2020년 미국의 하워드 휴스 의학연구소(HHMI)는 렉스의 암세포를 사용한 대가로 기부금 수십만달러를 헨리에타 랙스 재단에 내겠다고 밝혔다. 당시 에린 오시아(Erin O’Shea) 연구소장은 “헬라 세포가 부당하게 획득됐음을 인정하는 것이 옳다”며 “과학과 의학이 공정하게 되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사실도 인정한다”고 밝혔다.
대형 연구기관이 헬라 세포를 무단으로 실험에 쓴 데 대해 재정적 배상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사과는 비무장 흑인 남성이 경찰이 살해된 것을 계기로 벌어진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촉발했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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