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호 재판정에 평화는 올까 [프리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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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모범생이다.
손준성 검사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고발 사주 의혹 사건으로 공직선거법 등을 위반한 혐의를 받는 손준성 검사도 꼼짝없이 내내 앉아 있어야 한다.
혹시 통풍이 잘 되는 여름용 법복이 따로 있나? 쉰내가 날 때쯤 각자 집에 가져가서 빨래하고 다림질을 해오는 걸까? 이런 생각마저 들 무렵이면 의식이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서 그만 버럭 짜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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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모범생이다. 손준성 검사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재판 내내 자세가 흐트러지지도 않는다. 미간을 찌푸리고 메모를 하는 게 전부다. 도대체 뭘 적는 건지, 기사로 절대 안 쓸 테니 한 번만 보여달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다.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나처럼 고양이 발바닥을 그리고 있으면 어떡하지.
공판이 있는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울중앙지방법원 서관 509호 법정에 앉아 있으면 별별 생각이 다 든다. 고발 사주 의혹 사건으로 공직선거법 등을 위반한 혐의를 받는 손준성 검사도 꼼짝없이 내내 앉아 있어야 한다. 그를 마주보고 앉은 공수처 검사들도, 판사석에 앉은 판사들도, 방청석에 앉은 기자들도, 문 앞에 앉은 경위도 마찬가지다. 다들 고생한다.
오후 6시가 넘어가면 에어컨이 꺼진다. 반팔을 입고 있어도 더운 날씨라 법복을 입은 판사들은 한층 더 지쳐 보인다. 혹시 통풍이 잘 되는 여름용 법복이 따로 있나? 쉰내가 날 때쯤 각자 집에 가져가서 빨래하고 다림질을 해오는 걸까? 이런 생각마저 들 무렵이면 의식이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서… 그만 버럭 짜증이 난다. 이게 지금 다 뭐하는 짓이람. 왜 그런 고발장을 ‘전달’해서는 이 많은 사람들을 저녁도 못 먹게 하는 거야. 피고인석을 째려보면 그는 나보다 한층 더 깊은 주름을 짓고는 여전히 무언가를 적고 있다. 이제는 그 내용이 궁금하지도 않다. 그 성실함이 여러모로 안타깝다.
재판이 밤늦게 끝나면 법원을 빠져나가는 출구도 한 곳뿐이다. 검사도, 변호사도, 피고인도, 기자도 모두 섞여 낮은 목소리로 웅성이며 출구로 몰려간다. 마침내. 밀린 메시지를 확인하고, 택시를 잡고, 늦은 약속에 뛰어가기도 하면서. 영락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퇴근하는 직장인들이다. 알 수 없는 친근감이 든다. 재판은 기약 없이 길어지고 있고 몇 달 뒤 나는 판사의 겨울용 법복을 궁금해하다 또 역정이 나겠지만, 재판이 끝나는 날 그때만은 미사가 끝나면 서로 마주보며 인사하듯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해줄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과연 509호 법정에 평화는 올까? 누구를 위한 평화일까?
나경희 기자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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