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정부의 일리 있는 ‘우윳값 3000원’ 방어
‘1ℓ당 우윳값 3000원 시대’가 올까.
낙농가와 유업체들로 구성된 낙농진흥회가 오는 10월부터 음용유용 원유(原乳·우유의 원재료) 가격을 리터(ℓ)당 88원 올리기로 지난달 협의하면서 이런 전망이 쏟아졌다. 지금까지 유업체들은 원유 가격이 오르면 제품 가격을 인상해 수익성 악화에 대응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패턴을 잘 알고 있는 정부는 원유 가격 인상 폭이 결정되자마자 기민하게 움직였다. 지난달 28일 농림축산식품부는 유업체 10곳과 ‘낙농제도 개편 시행상황 점검 및 유업계 의견수렴을 위한 간담회’를 열고 가격 인상을 자제를 요청했다.
현재 정부는 우윳값 뿐 아니라 식품·유통업체에 전방위적으로 가격 인상을 자제해달라고 요청 중이다. 식품업계에서는 “가격 통제” “정부가 사기업에 눈치주기 한다”며 볼멘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우윳값에 있어서는 정부가 목소리 낼 여지가 있다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내놓고 싶다. 기업이 “가격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그 자신들의 사업 모델도 정부의 제도적, 경제적 지원이 없이 시장에서 자연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경우일 때 조금 더 쉽게 고개가 끄덕여질테다. 지금의 유업계가 과연 그런 시장이라고 말할 수 있나.
올해 우윳값 협상만 봐도 정부가 나서지 않고 기존 제도를 그대로 두고 시장에 맡겼다면 더 큰 폭으로 원유 가격이 인상됐을 터였다.
원유 가격은 지난 2013년부터 수요와 무관하게 생산비를 따져 낙농진흥회에서 책정(원유 가격 연동제)해왔다. 그래서 마시는 우유에 대한 수요는 줄었는데 가격은 계속 치솟는, 시장 경제 원리를 거스르는 기현상이 발생해왔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본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해 정권이 교체되는 와중에도 낙농제도 개편과 용도별 차등 가격제 도입을 밀어붙였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낙농제도 개편과 용도별 차등가격제 시행으로 유업계의 원유구매 부담이 최대 1100억원 정도 감소할 수 있다. 유업체들은 올해는 기존보다 합리적인 환경에서 원유 가격을 정할 수 있게 됐다.
제도 개편 추진이 한창이던 2022년 초로 돌아가본다. 그해 5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내각을 구성해 새로운 장관을 물색했다.
당시 의욕적으로 낙농제도 개편을 맡았던 농식품부 축산국 공무원들은 “이전 정부에서 추진하던 정책이다보니, 정권이 바뀌면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하며 떨었다. 당시 하마평에 올랐던 홍문표 의원의 경우 이런 제도 개편을 ‘낙농가 탄압’으로 바라보는 인물이었다.
다행히 정통 농정 관료 출신인 정황근 장관이 농식품부에 취임하면서 낙농제도 개편은 다시 힘을 받았다. 직전 정부의 사업이라서, 이익 단체들의 반발이 심해서, 정치권의 압력이 있어서 등 낙농산업 발전 방안이 고사될만한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하지만 그는 현직 관료들과 강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농성 중인 낙농가를 직접 찾아가는 등의 설득과 소통을 이어갔고, 제도 개편을 밀어붙였다.
개별 업체의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정부로부터 받는 혜택을 논하자면, 유업계 1위 서울우유를 빼놓을 수 없다. 농협중앙회 산하의 품목축협으로, ‘협동조합’이 누릴 수 있는 세제 혜택을 받고 있는 서울우유는 아주 유리한 조건에서 시장 경제에 참여하고 있다.
조세특례제한법 제72조에 따라 농업협동조합으로서 당기순이익의 9%(20억원 초과 구간에는 12%)만 법인세로 내고 있다. 이런 혜택을 받고 있는 서울우유는 남양유업, 매일유업보다 조금 더 정부의 가격 인상 자제 요청에 응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이번 만큼은 유업계가 적극적으로 정부의 물가 안정 호소에 동참하길 바라면, 너무 큰 욕심일까. 정부가 유업계를 돕는 건 소비자들에게 더 맛있고, 더 저렴한 가격으로 제품을 제공하길 바라는 취지일테다.
유업계는 소비자들이 겪는 물가 상승의 고통을 분담할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우윳값 3000원 시대가 좀 더 먼 미래에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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