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선 열풍, 日선 역풍… 바비에 무슨 일이?

베이징/이벌찬 특파원 2023. 8. 2.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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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 온 바벤하이머, 두 현상

지난달 31일 오후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 ‘바이리궁 영화관’에 핑크색 옷을 맞춰 입은 10·20대 여성들이 거센 태풍을 뚫고 몰려들었다. 이들은 여권(女權) 신장 메시지가 담긴 영화 ‘바비’를 관람하기 위한 ‘바비 지원부대’다. 관람객 관모(33)씨는 “‘우리(여성)는 늘 완벽해야 한다고 요구받는다’는 영화 속 대사에 감명받아 ‘N차(여러 차례) 관람’ 중”이라면서 “영화 바비 관람은 억압받는 중국 여성들이 연대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상하이·난징·쓰촨 등에서는 극장을 빌려 여성 50~60명이 바비를 단체 관람하는 행사가 열렸다.

중국에서 바비가 돌풍을 일으키는 사이 일본에선 이 영화가 국민들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고전하고 있다. 미국에서 같은 날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에 대한 제작진의 친밀감 표시가 화근이 됐다. ‘오펜하이머’는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으로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다룬 영화다. 미국에선 대작 두 개의 동시 개봉을 반기는 영화 팬들이 ‘바벤하이머(바비+오펜하이머)’란 신조어를 만들었고 이와 관련한 재치 있는 밈(합성 이미지)이 소셜미디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원폭 투하 당사국 일본으로선 재미로 넘기기에 역사의 상처가 아직은 너무 깊다.

◇中서 대흥행, 여성들 “공감된다”

중국 여성들이 영화 ‘바비’를 상징하는 핑크색 옷을 입고 합성 포스터 앞에서 찍은 사진. 중국 여성들 사이에서 ‘바비’는 남녀 평등과 여성 해방의 상징처럼 여겨지면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웨이보

중국과 미국 정부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지만 할리우드 영화 바비만큼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여자들의 영화’로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흥행 궤도에 본격적으로 올랐다. 지난달 21일 중국 개봉 첫날에는 극장 점유율이 2.4%에 불과했지만, 한 주 만에 10%를 넘어섰다. 매출 규모 또한 예상치였던 1억위안을 훌쩍 넘겨 1일 1억9400만위안(약 347억원)을 기록했다. 지난 1월 중국에 상륙한 마블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1억600만위안)의 기록을 이미 크게 앞선다.

바비가 인기를 끌면서 중국 중고 거래 사이트 ‘셴위’에선 의사 바비, 소방관 바비 등 ‘직업인 바비’ 인형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중이다. 우주인 바비 판매 글엔 하루 만에 구매 문의가 2000건 이상 몰렸다. 상하이에선 20·30대 여성들이 “어릴 때는 정품을 가져본 적 없다”면서 영화 개봉을 기념해 출시된 바비 인형을 구매하려 완구점에 줄을 섰다. 중국의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점인 ‘하오리라이’는 바비 케이크를 팔고 있고, 중국 곳곳의 주점에서는 ‘바비 핑크’ 칵테일이 메뉴에 올랐다.

영화 바비의 인기가 급상승한 이유에 대해 미국 작가 홍 핀처는 파이낸셜타임스에 “중국 여성들이 드디어 사회가 불평등하고 여성 혐오적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국 사회는 비교적 남녀가 평등한 사회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 여성들은 ‘직장에선 여자라 불이익을 받고, 가정에선 가사와 육아를 더 많이 맡아야 한다’고 토로한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인 정치국원 24명 중 여성은 한 명도 없다. 중국의 한 주간지 기자는 “최근 몇 년간 일본의 페미니즘 연구자 우에노 지즈코, 한국 소설 ‘82년생 김지영’ 등이 중국 여성의 눈을 뜨게 했다”고 했다.

◇日선 ‘바벤하이머’ 희화화 역풍

원자폭탄 개발자를 다룬 영화 ‘오펜하이머’ 주인공의 어깨에 바비가 앉아있고 배경으로 화염이 번지는 합성 사진. 일본의 홍보 회사 측이 ‘바벤하이머(바비+오펜하이머)’의 동시 개봉 유행에 기대서 ‘바비’를 홍보하려다 오히려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를 떠올리게 한다”는 역풍을 맞았다./트위터

또 다른 동아시아 국가 일본에선 바비가 반대로 거센 역풍을 맞고 있다. 미국에서 같은 날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대작 오펜하이머와 엮인 것이 화근이 됐다. 미국 개봉일이었던 지난달 21일, 바비 공식 홍보 계정이 트위터에 올린 사진 한 장이 일본 소셜미디어에 퍼지면서 논란이 커졌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바벤하이머’ 밈 중 하나를 전한 사진엔 바비와 오펜하이머의 두 주인공(마고 로비, 킬리언 머피)이 폭발 장면을 연상시키는 불꽃과 ‘버섯구름’ 앞에서 활짝 웃는 모습이 담겼다. 바비 측은 이 사진을 트위터에 퍼다 나르면서 신이 난다는 듯 “잊을 수 없는 여름이 될 것”이라는 코멘트를 달았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당시 원폭 개발에 참여한 미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전기물로 1945년 원폭 투하로 막대한 희생자가 나온 일본인들 입장에선 개봉을 반기기가 어렵다. 영화 업계가 조심스러운 입장인데, 바비 측이 원폭 폭발을 연상케 하는 오펜하이머 속 장면을 홍보에 쓰자 비난이 거세졌다. 일본 네티즌들은 “당신들이 뽐내는 ‘PC(정치적 올바름) 주의’와 모순된 이 추악함은 무엇이냐” “당장 (원폭 투하지) 히로시마를 찾아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배워라” 등 수위 높은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소셜미디어 등에서 바비를 향한 비난이 커지자 바비 배급사 워너브러더스의 일본 지사는 지난달 31일 공식 웹사이트에 “배려심이 부족한 투고를 해 유감입니다. 사태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라는 사과문을 게시했다.

영화 바비는 일본에서 오는 11일 개봉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일본 내 흥행이 훨씬 어려워졌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오펜하이머의 경우 아직 개봉일이 정해지지 않았고, 일각에선 개봉을 아예 안 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산케이신문은 영화 오펜하이머에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당시나 그 후 장면이 담겨 있진 않았다”고 지난달 22일 보도했다. 한국에선 광복절인 8월 15일에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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