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사람을 죽이는 한마디

이진혁 출판편집자 2023. 8. 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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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열대야가 이어지면 데자뷔처럼 떠오르는 해가 있다. ‘역대 최고의 더위’를 꼽을 때 항상 순위권에 드는 1994년이다. 폭염으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 갈라지는 논바닥, 아스팔트 위에서 계란이 익는 장면 등 그해 더위는 방송 뉴스의 여러 장면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당시 어렸던 나는 무더위보다는 월드컵이 먼저 떠오른다. 우리나라가 조별 예선에서 탈락해버린 그 월드컵이 여전히 생생한 건, 콜롬비아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라는 선수 때문이다.

에스코바르는 미국과 치른 경기에서 자책골을 넣었고, 우승 후보 콜롬비아는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는 책임을 지기 위해 동료들보다 먼저 귀국했는데 며칠 뒤 총을 열두 발이나 맞고 죽었다. 우리나라에서 ‘자살골’이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축구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고?’ 어린 나이에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1994년을 생각하면 아직도 등줄기가 서늘하다.

올해 여름도 무더위가 기승이다. 이제 나는 축구보다 사소한 이유로도 사람이 죽는다는 걸 잘 안다. 그리고 세상에 사람을 죽게 하는 말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특히 댓글 창에 넘쳐나는 혐오와 분노를 보고 있을 때 그렇다. 만약 1994년에 포털 사이트와 인스타그램이 있었다면, 어쩌면 그 축구 선수는 총에 맞지 않고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는 쉽게 말한다. ‘말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고?’ 하지만 최근 일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생님 사례를 보자면, 그런 일은 수시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문제는 이러한 비극에도 아랑곳없이 날 선 말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에는 악플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는 등 변화 조짐이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말에 관해서라면 여전히 관대한 편이다. 자유에 책임이 따른다는 단순한 진리를 망각한다면 무더운 올여름 또한 서늘하게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독일 베를린 시청에는 이런 문구가 걸려 있다고 한다. “말은 한 사람 입에서 나오지만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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