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한복판에서 '여름'을 노래하라!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2023. 8. 2.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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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한낮 땡볕에 허덕이다가 편백나무 숲속 그늘로 들어서면 금세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도처에서 매미가 울어댄다. 바위를 쪼갤 듯 맹렬하고 처연한 매미 울음소리는 지금이 여름의 한복판이라는 걸 알리는 신호다. 매미의 생명주기는 길어야 여름 한 철이다. 땅속에서 굼벵이로 몇 년간 살다가 성체로 지상에 나와서는 보름 정도 울다가 죽는 게 매미다. 매미가 저리도 울어대는 까닭은 짝짓기할 상대를 찾기 위함이다. 짝짓기를 마친 뒤 매미는 제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죽는다.

 공평하게 주어진 무상의 선물

어느 해 강원도의 휴양지에서 맞은 가을 새벽, 산책을 나섰다가 매미 사체들이 포장도로에 새까맣게 추락해 뒹구는 걸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가슴이 서늘해질 만큼 장엄한 주검의 현장이었다. 아직 죽지 않은 매미들은 찬 이슬에 젖은 날개를 떨며 퍼덕이었는데, 그 찰나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바쇼) 같은 하이쿠를 혼자 속으로 읊조리며 아, 올여름도 끝났구나, 했다.

여름이 베푸는 지복은 무상의 선물처럼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풍부한 일조량과 향기로운 계절 과일들, 수목의 그늘, 젊음의 활력과 낙관주의, 바닷가의 향락, 그리고 느닷없이 찾아온 사랑의 인연들! 우리는 여름에 베푸는 그 모든 것을 거저 즐기고 맛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바다나 휴양지로 휴가를 떠난 뒤 도시는 텅 빈다. 도심에 남은 이들은 냉방장치로 공기가 서늘한 카페를 찾아가 책 몇 쪽을 읽거나 친구와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낸다.

여름 정오의 땡볕 아래로 나서면 그 기세는 자못 살벌하다. 땡볕의 고열로 아스팔트가 끈적하게 녹아내리는데, 우리는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동네 단골식당으로 칼국수를 먹으러 몰려간다. 칼국수를 먹느라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데, 바지락 국물은 맑고 뜨겁고 짭짤하다.

저녁에는 식구들과 함께 수분을 듬뿍 머금은 장호원에서 나오는 잘 익은 황도를 깨물어 먹는다.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복숭아는 단맛과 진한 향기를 뿜어낸다. 남은 생애 동안 식구들과 황도를 먹는 여름 저녁의 행복을 몇 번이나 겪을까를 세다가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진절머리를 친다.

여름이 끝날 무렵 휴가지에서 돌아온 이들은 햇볕에 그을려 웃을 때마다 치아만 유독 하얗게 반짝인다. 그들은 어딘가 낯선데, 예전에 알던 사람들이 아닌 듯하다. 여름의 지복을 충분히 즐긴 그들은 갑자기 내면이 성숙한 듯 느껴진다. 여름을 행복의 질료로 삼은 이들은 더 명랑하고 낙관적으로 변하는 게 틀림없다. 알베르 카뮈는 고향 알제에서 보낸 여름을 자주 회상하며, 가난조차 사치가 되게 만드는 알제에서 보낸 여름의 마술적 행복에 대해 아름다운 산문을 여러 편 남겼다.

“숱한 폭력과 경직 끝에, 9월의 첫 비가 내린다. 마치 며칠 새 이 고장에 부드러움이 스민 듯, 해방된 대지의 첫 눈물 같은 비다. 같은 시기에 캐롭나무가 알제리 전역에 사랑의 향기를 퍼뜨린다. 저녁이나 비가 내린 뒤에, 쌉싸름한 아몬드 향 정액으로 배를 적신 대지 전체가 여름 내내 태양에 바쳤던 몸을 쉬게 하고 휴식하게 한다. 이제 이 냄새는 다시 인간과 대지의 결혼을 축복하고,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생생한 단 하나의 사랑을 일깨운다. 끝내는 스러질 것이나 너그러운 사랑을.”(알베르 카뮈, <결혼·여름>)

여름은 끝을 향해 치달린다. 여름이 끝나면 여름이 달군 대지를 식히는 9월의 첫 비가 내린다. 대지와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적시는 비는 여름의 준엄한 추억과 교훈을 일깨운다.

여름마다 고향의 맨드라미는 피었다 지고, 석류 열매는 알이 굵어지며 익어간다. 석류 속껍질 안쪽으로 물방울 모양의 종자들이 홍보석처럼 빼곡하게 박혀 여문다. 태양의 진리 아래에서 석류가 익어가듯이 우리도 익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여름에 더 충실하자! 미간을 찌푸리며 허송세월하며 보내기에 여름이란 계절은 너무 아깝다. 여름은 사소한 쾌락들을 허용하는 가운데 고매한 정신을, 약간의 미덕과 자긍심을 키우기에 적당한 계절이다.

 저토록 넘치는 눈부신 빛이여!

당신 피와 심장이 시키는 대로 살아라! 우리는 저 넘치는 눈부신 빛 아래에서 쾌락주의자로 사는 데 망설임이나 가책을 덜 느끼게 될 것이다. 여름보다 더 오래된 여름, 한 줌 희망은 그것으로 충분하고, 청송 사과들이 끝과 시작을 품고 둥근 생을 빚을 때 당신의 여름도 막을 내리게 될 것임을, 우리는 깨닫는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의 젊은 수사들처럼 우리는 최선을 다해 여름을 견뎌냈다. 어제는 오슬로에 사는 지인에게 편지를 쓰고, 오늘 오후엔 하지 감자를 쪄서 천일염에 찍어 먹는다. 여름의 잔해들은 여기저기 뒹군다. 세탁하려고 내놓은 바짓자락에서 바닷가 모래가 우수수 쏟아질 때 우리는 여름의 쓸쓸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발견한다. 뇌우가 우는 저녁이 한 줄로 다가오고, 비가 대지를 적시면 우리는 여름이 끝날 것을 예감한다.

들길에서 만나던 어린 뱀들과 장마 때 울어대던 맹꽁이들은 다 자취를 감췄다. 비 그친 저녁의 풀벌레들은 마치 파리나무십자가소년합창단 소년들처럼 쓸쓸하고 청아한 목소리로 운다. 자정 너머 불끈 솟은 달은 조도를 올려 밤의 야경꾼처럼 도시 골목들을 순찰한다. 당신은 여름이 오기 전보다 조금 더 외로워지고 선량해지겠으나 우리 생활이 더 윤택해지리라는 기대는 대체로 난망하다.

하지만 우리 사랑은 여름 내내 잡초처럼 웃자라고, 진리와 바다는 항상 우리 뒤에서 천둥처럼 운다. 아, 옛 여행자들은 여름마다 아무 보상도 없이 먼 곳까지 걸어갔다가 되돌아왔다. 우리는 여름의 열광과 환멸을 배우고 익히며,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걸 배운다. 긴소매 옷을 꺼내 입고 소슬바람이 부는 언덕에 서서 또 하나의 여름을 전송하는 동안 당신 안의 어린 짐승들이 죽고 당신의 털빛은 색깔이 바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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