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진보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일들
진보와 관용의 이상도 설 자리 잃어
미 실리콘밸리에서 살던 지인이 최근 한국을 다녀가면서 들려준 샌프란시스코 얘기는 듣고도 믿기 어려웠다. 해외 관광객이 늘고 있다지만, 도심 상점에선 좀도둑이 대낮에 보안요원이 보는 앞에서 물건을 훔쳐 당당하게 문을 나설 정도로 치안이 나빠졌다고 했다. 그는 “1000달러 미만 절도는 기소하지 않는 법이 생겨 좀도둑이 늘고 있다”며 “노숙자가 넘쳐나고 대놓고 마약을 거래하는 중독자들이 많아 가족과 함께 놀러 가기 겁난다”고 했다.
현지 언론의 지적도 다르지 않다. CNN은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약국 체인을 취재하는 30분간 3건의 절도를 목격했다고 보도했다. 매장은 상품을 진열한 선반에 자물쇠를 달고 음료수가 담긴 냉장고 문은 직원 도움 없이 열지 못하게 쇠사슬까지 묶어뒀다. 미국 대도시 중 필라델피아 다음으로 마약 관련 사망률도 높다. 공원에서 놀던 10개월 아이가 누군가 버린 펜타닐을 입에 넣었다가 생사를 오가는 비극이 벌어진다.
범죄와 경제는 상극이다. 미 서부의 금융 중심지인 샌프란시스코는 뉴욕, 일본 도쿄 다음으로 백만장자가 많다. 범죄가 무서워 상점과 백화점이 문을 닫고 부자와 중산층이 차례로 떠나면 도시엔 떠날 곳이 없는 가난한 이만 남는다. 부동산이 폭락하고 세수가 줄어 경찰 소방 등 도시 핵심 기능도 무너진다. 디트로이트와 뉴욕의 할렘 등 슬럼화된 도시들이 겪은 이 ‘파멸적 고리(doom loop)’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중산층과 젊은이들이 찾는 슈퍼인 홀푸드마켓은 샌프란시스코 거점 매장을 닫았다. 중심가인 유니언스퀘어의 고급 백화점 노드스트롬도 30여 년 만에 문을 닫는다. 미국의 도시학자인 제인 제이컵스는 “가게 주인들은 거리 안전의 직접적 이해당사자이자 감시자이며 관리인”이라고 말했다. 상점이 사라지면 거리는 더 위험해진다.
샌프란시스코는 민주당이 시장을 독식해온 ‘진보 도시’다. 히피 문화의 발상지이자 소수인종, 동성애 등을 포용하는 진보와 관용의 도시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범죄와 마약에 대한 지나친 관용, 주택 공급 부족 등의 실책이 이어지면서 빛을 잃어가고 있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등 진보적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았던 체사 부딘 샌프란시스코 검사장은 좀도둑과 마약 등에 온정적인 정책을 펴다가 지난해 주민소환 투표에서 쫓겨났다. 2018년 미 첫 흑인 여성 시장이 된 민주당 소속 런던 브리드 시장은 범죄 문제가 심각해지자 뒤늦게 경찰 예산을 증액했다. 시의 세수가 줄어 막대한 재정적자가 예상되는데도 시 의회는 노예제와 인종차별 피해 보상금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구당 500만 달러를 지급하는 ‘흑인 보상(Black reparation)’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최근 샌프란시스코 도심을 취재하다가 마약중독자의 공격을 받은 영국 언론사 텔레그래프 취재팀은 “샌프란시스코의 고난은 다른 지역이 이 같은 급진적인 진보 정책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경고”라고 전했다. ‘사회적 약자를 보듬어야 한다’는 진보 정치의 이상도 치안, 주거 등 시민이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생활 정치’에 실패하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샌프란시스코엔 대지진, 닷컴버블, 글로벌 금융위기 등 위기마다 오뚝이처럼 일어섰던 80여만 명의 시민이 있다는 점이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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