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강원 노포 탐방] 55. 원주 평원식품·경선장

권혜민 2023. 8. 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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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하고 그윽한 향이 솔솔∼4대째 이어온 평원동 사랑방
1959년 증조모 기름집 개업
입소문 나 전국 단골들 발길
현재 조부·부친·삼촌이 운영
4대 기훈·기찬 형제 가업 이어
평원식품 맞은편 옛 여관 개조
카페 겸 방앗간 경선장 문 열어
4대에 걸친 가족 이야기 녹여
옛것·현대 공존하는 이색 공간
남녀노소 찾는 구도심 핫플로
경선장 안에서 바라본 평원식품.

3대에 걸쳐 운영 중인 ‘방앗간’을 4대인 20, 30대 두 형제가 현대적인 공간으로 확장해 이색적으로 꾸려나가는 곳이 있다. 원주 민속풍물시장 옆 평원동에 위치한 방앗간 ‘평원식품’과 카페 ‘경선장’이다.

‘평원식품’은 64년 전인 1959년 봉천내(현 원주천) 판자촌 일대에서 ‘대구 기름집’이란 상호로 문을 열었다. 경선장 사장인 강기훈(30)·기찬(29)씨 형제의 증조할머니가 초대 사장이다. 당시 원주에서는 기름 짜는 유압기계를 처음 들인 가게다. 1986년 평원동 중앙시장길로 자리를 옮기며 상호를 ‘평원식품’으로 바꿨다. 대구 기름집 시절부터 맛 좋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장소를 옮기고, 상호를 바꿔도 단골손님이 계속 늘어 현재에 이르렀다.

현재 평원식품은 기훈 씨의 할아버지인 강신호(85)옹과 아버지, 삼촌인 창석(56)·화석(50)씨가 함께 일하고 있다. 창석 씨와 화석 씨가 20대 이른 나이에 가업에 뛰어들면서 가게일을 확장시키겠다는 열정으로 발품을 팔아 판매처를 늘리기 시작했다. 2001년 원예농협 납품을 시작하는 등 현재 지역 농협, 식당 등 여러 곳에 기름을 판매하고 있다. 제천, 대구 등 전국에서 단골들이 찾는다.

평원식품 2대 사장 강신호(85) 옹이 기름을 짜고 있다.

평원식품과 좁은 길 하나를 두고 마주한 카페 겸 방앗간 ‘경선장’은 4대인 기훈·기찬 씨의 공간이다. 어린시절부터 언젠가는 방앗간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형제는 수년전 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기훈 씨는 중학교 3학년 이후 미국에 살면서 의류 MD와 경영에 대해 공부했다. 인턴생활을 하고 진로를 고민하다 3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고 동생으로부터 ‘방앗간 일을 해야겠다’는 말을 들었다. 기찬 씨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국립발레단에 들어갔으나 허리 부상으로 발레를 그만둬야 했다. 방앗간 일을 할지, 전에 일했던 카페 일을 다시 할지 고민이었다고 회상했다.

기훈 씨는 “가업을 잇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기업, 특히 대기업을 떠올리지만 미국에서 부모님의 타코집, 옷가게 등을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물려 받아 젊은 세대에 맞는 새로운 아이템을 도입, ‘리브랜딩’하는 것을 많이 봤다”고 말했다.

카페로 리모델링하기 전 여관 경선장 모습.

‘경선장’은 원래 집안 소유의 여관 건물이다. 어린시절 추억이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손님이 줄고 건물 관리가 어려워지면서 낡은 공간이 됐다. 그는 “3~4년전부터 구체적으로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여관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부터 시작했다”고 떠올렸다. 다만 방앗간을 확장하는 것이 아닌, ‘현대적인’ 아이템을 결합시키기로 했다. 기름만으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먼저 방앗간 일을 배워야 했다. 일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아버지는 “내 대에서 끝내려고 했다”며 반대했다. 기훈 씨는 “고향으로 돌아와 1년 가까이 새벽같이 방앗간으로 나가 일을 배웠다. 할머니도 처음에는 이걸 왜 하려고 하냐고 하셨다”고 말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좋은 기름을 짜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깨를 적당한 온도에서 볶는 일이다. 정확한 온도를 찾기 위해 촉각, 후각, 시각이 동원된다. 깨를 씻는 것도 만만치 않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 해야 하는 과정이다. 손님들이 직접 농사지은 깨를 가져오기에 벌레, 먼지, 작은 돌 등 불순물이 섞여 있다. 들깨는 가벼워서 물에서 휘휘 저어 떠오른 것을 건지면 되지만, 참깨는 불순물과 함께 가라 앉아 3~4번은 씻어야 깨끗하다. 기훈 씨는 “할아버지는 손으로 열 체크를 다 하신다. 그게 기술이다. 똑같이 따라하려고 하는데 잘 안된다. 깨를 씻고 돌을 거르는데도 스냅이 필요하다. 쉬운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경선장 참기름.

가족들을 설득해 차린 카페 겸 방앗간은 여관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여기에 리브랜딩 작업을 통해 ‘볕 경(景), 물려줄 선(禪), 장소 장(場)’이란 뜻을 붙였다. ‘볕 아래 키운 좋은 것들, 따뜻한 문화를 모든 사람에게 물려준다’는 의미다. 약 1년간의 리모델링 공사를 통해 1층은 오픈형 방앗간인 제조실과 쇼룸으로, 2층과 옥상은 카페로 탈바꿈, 지난해 4월 문을 열었다. 제조실에는 최신식 기계를 들여 선물용 참기름과 들기름을 직접 짜 판매하고 있다. 참깨와 들깨는 원주, 제천 등의 농가에서 수확한 국산만을 쓴다. 카페 메뉴도 특이하다. 참깨 크림라테, 흑임자 크림라테, 흑임자 아이스크림, 미숫가루 등이다. 할머니의 맛있는 식혜를 경선장의 스타일로 선보인 ‘박홍자 식혜’도 있다.

무엇보다 이 공간에 가장 공 들인 것은 ‘가족의 스토리’를 담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양해를 구해 가족사진을 모으고, 방앗간이 시작됐을 때 이야기 등을 알아내기 시작했다. 4대에 걸친 가족의 이야기는 경선장 홍보 팸플릿에 담아, 카페에 비치하고 있다.

카페 문을 연지 약 1년 3개월. 전국에서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면서 구도심 속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경선장의 형제 사장 강기훈·기찬 씨 가족사진.

과거 이 동네는 기차가 지나가 사람들의 왕래도 많고 활기찼다. 상점들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발길이 줄면서 구도심 중 한 곳이 됐다. 그렇지만 간판과 외벽은 바뀌어도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인 점이 기훈 씨의 뇌리를 스쳤다. 기훈 씨는 “젊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 단절된 곳으로 보이지만 그게 이 동네의 매력이다”며 “경선장에 오신 분들이 평원동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손님들이 ‘공간이 이쁘다, 음료도 맛있다’에서 더 나아가 ‘이런 곳이 있었구나’를 알게 될 때 가장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금 평원동의 중앙선 폐철도가 바람길숲으로 조성되는 공사가 한창이다. 그는 “큰 동네에 공원이 생긴다고 하면 평범하지만, 여기 같은 동네에 공원이 생긴다는 것은 한줄기 빛과 같다”며 “바람길숲을 오는 사람들이 이 동네에 들려 정겨움을 느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방앗간이 동네 사랑방인 것처럼, 경선장도 신(新)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동네 어르신들이 들러 “장사 잘 되느냐”는 안부를 물어오시고, “이곳이 생겨서 정말 좋다”고 칭찬도 해주신다. 경선장 앞에는 어르신들이 쉬어갈 수 있는 벤치도 마련돼 있다.

손님들은 경선장을 방앗간으로 알고 오기도, 카페로 알고 오기도, 우연히 길을 가다 찾아 오기도 한다. 젊은 사람들이 와도 이상하지 않고,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와서 커피를 마셔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곳이다. “경선장을 한 단어로 정의하면 옛것과 현대의 ‘공존’입니다” 기훈 씨의 말이다. 권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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