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시선] 공영방송 거버넌스의 독립성

2023. 8. 1.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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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ZDF 사장 ‘외압 받지 않는 권한’ 보장
정치권, 전리품 취급 땐 정쟁 도구로 전락

단일 TV방송국으로는 유럽 최대 규모인 독일제이공영방송(ZDF)은 2002년 3월 대혼란을 겪었다. 공영방송 이사회인 방송평의회는 네 명의 사장 후보를 두고 세 차례나 투표를 했지만, 적임자를 뽑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77명의 평의원은 보수 성향 43명과 진보 성향 34명으로 나뉘어 무한 대립을 이어갔다. ZDF설치법에 따르면 재적 인원 5분의 3의 찬성이 있어야 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사장은 뽑혔지만, 공영방송을 둘러싼 정치후견주의의 폐해는 큰 상처를 남겼다.

이 사건은 독일헌법재판소에서 방송법 일부 위헌으로 결정되었으며, 독일 정부는 헌재 판결에 따라서 공영방송을 관리 감독하는 기관을 구성할 때 정치권 추천 몫을 정원의 3분의 1 이하로 줄이도록 법을 개정했다. 물론 법 개정 이후에도 정치후견주의가 아예 없어지진 않았지만, 2002년 ZDF사태와 같은 추태는 반복되지 않았다.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겸임교수
독일 공영방송에는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지켜 주는 유·무형의 제도적 안전장치가 있다. 첫째는 공영방송 최고경영자인 사장에게 주어지는 전권이다. 사장은 경영과 인사에 대해 최고책임자로, 외부로부터 그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도록 권한을 보장받는다. 1962년에 설립된 ZDF에서는 지난 50년간 단지 5명이 사장으로 재임했고, 이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10년이다. 2002년 물러난 슈톨테 사장은 무려 20년간 재임했다. 이러한 사례는 유럽의 공영방송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둘째는 역할 분담이다. 기자 출신이 사장이 되더라도 제작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나아가 아예 경영과 제작을 분리한다. ZDF 사장은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의 정치인이나 언론인이 맡았고, 시사 보도를 총괄하는 보도국장은 진보 성향의 언론인이 맡았다. 방송사 내부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균형 있는 방송을 만들어 왔다.

셋째로 내적 자유를 감독하는 건강한 외부 감독 기관의 존재이다. 독일에서 방송평의회는 공영방송설치법에 따라서 정치권이 추천하는 정원의 3분의 1 이외에 3분의 2는 사회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단체와 기관에서 지명한다. 예컨대 경제인 단체가 위원을 추천하면, 노동 단체에도 동일한 몫을 보장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구성된 평의회에서는 숙의를 통해 가장 바람직한 공영방송을 위한 논의를 한다.

공영방송을 관리 감독하는 기구는 각 국가마다 정치체제 발달과 미디어 환경에 따라 다르다. 공통점은 독립성과 전문성 보장이다. 우리나라도 독일처럼 갈등을 겪으며 대안을 모색해 왔다. 지난 20대 국회와 지금의 21대 국회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다양한 법안이 제출되었고, 여야가 이견을 좁히기도 했다. 실제로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의원이 2016년 7월에 대표발의한 법률과 국민의힘 박성중 의원이 2020년 8월 대표발의한 법률의 내용은 90% 이상 일치한다. 예컨대 한국사회의 특성을 반영하여 공영방송 이사를 정부 여당이 7명, 야당이 6명씩 추천하고, 사장은 사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특별다수제(3분의 2 이상의 찬성)로 선출하자는 방안이다. 이렇듯 2020년은 입법 가능성이 컸지만, 불행히도 법은 제정되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우호적인 공영방송 이사와 사장 선임을 위해 입법은 미뤄졌고, 방송법 개정안은 선거 후에야 다시 논의됐다. 반대로 정권 교체로 야당에서 여당이 되자 현 정부 여당도 자신들이 발의한 합리적 대안마저 외면하고 있다.

현재 공영방송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수준의 물리적 압박을 받고 있다. 공영방송 재원인 수신료의 분리징수로 최악의 재정난이 예측되고, 정부 여당은 전 정부에서 임명한 공영방송 이사를 차례로 해임하고 있다. 인사청문회를 앞둔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를 두고 찬반 논란도 커지고 있다. 정치권이 공영방송을 전리품으로 취급하는 한, 공영방송은 정쟁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퇴행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적 영역에 존재해야 할 안전지대가 공고해야만 한다. 그 중심에 독립성을 보장받는 공영방송이 있어야 한다.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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