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피해 외국인 “다 물어봐도 방 한칸이 안 된대요”
사기당한 사실 알기 쉽지 않고…특별법 ‘내국인용’ 한계
피해 인정돼도 지원받기 어려워…“똑같은 피해자” 호소
“내국인도 가족 5명을 데리고 친·인척 집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죠. 외국인 처지에는 훨씬 더 어려워요. 갈 곳이 없어요.”
재외동포 고홍남씨(42)는 1일 다섯 식구와 함께 인천 연수구 재외동포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직적 전세사기를 당한 외국인들을 위한 정부의 지원을 촉구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인 고씨는 2주 전쯤 낙찰자로부터 ‘짐을 싸서 나가라’는 내용증명을 받았다. 밤 10시까지 야간 잔업을 마다하지 않고 모은 전세보증금 5000만원을 잃은 고씨는 부모, 장모, 부인, 초등학교 1학년 딸과 함께 살 보금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막막하기만 하다.
외국인인 고씨는 전세사기를 당한 사실을 알기도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부동산 계약이 생전 처음이었던 고씨는 2021년 12월 집을 계약할 당시 등기부등본을 떼보지 못했다. 계약 한 달 뒤에야 서류를 받아본 고씨는 집주인이 당초 계약자가 아니라 신탁회사로 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계약을 중개한 공인중개사는 고씨를 돕기는커녕 영문을 묻는 고씨에게 “임대인이 재력가라 돈을 제대로 갚고 있고 걱정할 필요는 하나도 없다”며 안심시켰다.
고씨가 지난 1월 집이 경매에 부쳐졌다는 우편물을 받았을 때도 공인중개사는 “무슨 일이 생기면 최우선변제금으로 43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못 받은 전세금은 임대인의 대리인이 대신 줄 것”이라고 고씨를 속였다.
지난달 6일 고씨는 피해지원센터를 찾았지만 ‘신탁 사기는 특별법에 해당이 안 된다. 일단 피해자 신청은 해둘 텐데 안 될 가능성이 크다’는 답변을 받았다. 고씨는 “한국에 오래 있긴 했지만 제 이름으로 계약한 집이 처음이었다”면서 “똑같은 피해자인데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고 했다.
고씨가 특별법상 피해자로 인정받더라도 지원받기는 여의치 않다.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제공되는 긴급금융지원과 긴급주거지원 등은 국가재정과 주택도시기금이 재원이라 ‘내국인’에게만 제공된다. 고씨는 “특별법의 도움을 받고자 했는데 외국인 신분이라서 해당 사항이 없다고 한다”면서 “국토교통부, LH(한국토지주택공사), 인천시, 피해지원센터에 문의해도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고작 그 방 한 칸이 안 된다고 한다”고 했다.
“당장은 방학해서 그나마 다행인데 집을 빼라고 하면 딸아이 학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씨는 누구보다도 어린 딸이 눈에 밟힌다고 했다. 그는 “간절히 원하는 것은 전세사기가 해결될 때까지 여섯 식구가 버틸 수 있는 방 한 칸”이라며 “조직적 사기를 당한 동포들이 길거리로 쫓겨 나가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건 고씨만이 아니다. 이날 인천시에 따르면 전세사기 피해자 1672명이 대출과 긴급주거 상담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외국인 18명이 포함돼 있다. 지난 6월부터 시행된 전세사기지원특별법 적용 신청자 중 외국인은 54명이지만 11명만 대상자로 결정됐다.
인천시는 전세사기 피해자를 위해 1년간 월세 지원과 버팀목 대출 이자 지원, 긴급주거 주택 지원 등을 하고 있지만, 외국인이 받을 수 있는 것은 1년간 월세 지원뿐이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 관계자는 “전세사기를 당했는데도 사기를 당했는지조차 모르는 외국인들이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재외동포청이 개설된 만큼 동포청이 적극 나서 전세사기를 당한 외국인과 재외동포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송이·박준철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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