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독일인의 낮잠
스페인 사람들이 즐기는 낮잠 ‘시에스타’는 ‘여섯 번째 시간’이란 뜻의 라틴어 ‘hora sexta’에서 왔다. 가톨릭에서 하루 중 여섯 번째 기도를 올리는 시간이 대략 정오라는 데서 비롯됐다. 포르투갈 남부에서 시작돼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스 등 남부 유럽으로 퍼졌다. 여름 낮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나라들이다. 대신 습도가 낮아 그늘에 들어가면 에어컨 없이도 쉽게 잠들 수 있다.
▶오후 2~3시쯤 피로와 졸음이 몰려오는 몸의 변화를 ‘애프터눈 슬럼프’라 한다. 졸음운전 사고 비율이 가장 높은 시간대이기도 하다. 시에스타는 이런 사고를 줄여주는 기능도 있다. 깨어 있는 동안 뇌에는 피로 유발 물질인 아데노신이 쌓이는데 낮잠은 이 농도를 낮춰 줘 사고 위험을 줄이고 오후를 활기차게 만들어 준다.
▶북유럽엔 시에스타 문화가 드물다. 독일은 나아가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시에스타를 남유럽인이 게으른 증거로 본다. 독일인은 기상 시간도 전 유럽에서 가장 이르다. 오전 6시 23분에 일어나 밤 10시 47분에 잠든다는 통계도 있다. 2010년대 국가 부도 위기에 빠진 그리스가 독일에 채무를 못 갚겠다고 버틴 적이 있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이 뉴스를 전하며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이 춤추며 노는 장면을 표지 그림으로 썼다. 놀고먹으며 낮잠이나 자는 조르바처럼 굴다가 빚쟁이가 됐다고 지적했다.
▶독일 남부의 광활한 구릉지대인 흑림(黑林)은 여름 최고기온 평균이 섭씨 25도에 불과하다. ‘독일엔 여름이 없으니 낮잠도 필요 없다’는 말에 많은 이가 공감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독일에서 “남유럽처럼 시에스타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32~35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이 여름마다 반복되면서 나타난 변화다. 독일 정부도 “더위에 낮잠을 자는 것은 나쁜 제안이 아니다”라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메르켈 전 총리가 재작년 퇴임하며 “독서와 낮잠을 즐기겠다”고 한 것에도 낮잠에 대한 독일인의 인식 변화가 깔려 있다.
▶다만, 독일인답게 낮잠의 효용을 강조한다. 한 의대 연구팀은 낮잠을 자면 밤에만 잘 때보다 기억력이 5배 높아진다며 두뇌를 쓰는 전문직일수록 낮잠을 즐기라고 권했다. ‘게으름의 즐거움에 대하여’라는 책도 나왔는데 낮잠이 건강에 미치는 좋은 영향을 강조한 의학자의 저서다. 긴 낮잠이 중요한 밤잠을 방해해 건강에 해롭다는 주장도 많지만 기후변화는 낮잠에 적대적이었던 독일인의 생각마저 바꾸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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