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의 상처가 미래를 바꾸려면
[세상읽기]
[세상읽기] 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휴가철엔 책을 읽자. 한동안 화제였던 어느 칼럼에선 “흥미로운 중년이 되기 위하여” 책을 읽어야 한단다. 중년으로 불리기까지 아직 몇년은 남았지만, 그때 가서 시작하면 이미 늦은 거란 말도 있음을 기억하자. 평소엔 바빠서 짬이 잘 안 나니 휴가 기간에라도 책을 읽기로 한다.
그렇게 집어 든 책이 ‘우리의 상처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다. 김승섭, 김사강, 김새롬, 김지환, 김희진, 변재원 여섯명의 눈 밝은 연구자들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가장 취약했던 분야를 조명했다. 이들이 주목한 대상은 이주민,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아동, 여성이다. 우리나라의 코로나19 대응은 평균적으로 훌륭했지만, 그 이면의 고통과 고립, 차별과 배제는 충분히 얘기되지 못했다.
이 책은 논문, 보고서, 신문 기사, 인터뷰를 통해 코로나19 유행 중 취약계층의 경험을 갈무리했다. 예컨대 이주민 노동자는 정보와 지원에서 배제된 채 감염과 동시에 처벌과 추방을 두려워해야 했다. 발달장애인은 생활양식의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기존에 누리던 일상의 ‘루틴’을 훼손당했다. 잦은 격리는 장애인 자신과 가족들에게 오랜 기간 트라우마로 남았다. 여성은 사회의 돌봄 대부분을 담당하며 감염 위험 속에 과중한 업무를 수행해야 했고, 동시에 가정의 돌봄 대부분을 담당하며 실직과 경력 단절을 겪어야 했다.
책의 3장에 따르면 2020년 한국 노동자의 연간 병결 일수는 1.4일로, 스페인(9.7일)과 핀란드(9.1일)에 비해 한참 적다. 한국인들이 유독 튼튼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10만명당 산재사망률은 스페인(2.1명), 핀란드(0.7명)보다 한국(4.7명)이 도리어 더 많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죽기 전까진 쉬지도 못한다는 뜻이다. 그나마 있는 ‘아프면 쉴 권리’조차 불균형하게 적용된다. 유급병가를 주는 사업장은 전체 21%에 불과했다. 대기업보단 중소기업이, 원청보단 하청업체가, 정규직보단 비정규직 노동자가 더 못 쉬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조적 불평등은 단시간에 바뀌지 않는다. 코로나19 관련 각종 의무와 지원이 사라지는 가운데 유행이 계속되고 있다. 감염의 위험이 예전보다 감소했고, 언제까지 대규모 재정을 들여 긴급대응을 유지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준비도 안 된 채 모든 지원이 사라지면 취약계층의 피해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유행이 확산하면서 아파도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 아파도 쉬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란 우려는 기우에 불과할까.
더구나 코로나19 유행이 끝이 아니다. 팬데믹보다 더 오래, 더 깊은 상처를 남길 또 다른 재난은 바로 기후위기다. 올 7월 지구의 평균기온은 역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오며 전 세계적으로 막심한 피해를 주고 있다. 이번에도 재난의 상흔은 아래쪽에 쌓인다. 극한기후는 비닐하우스의 이주 노동자와, 뜨거운 불 앞의 급식 노동자와, 보호막 없이 뙤약볕을 누비는 배달 기사들을 직격했다. 고용이 불안정한 이들에게 더워도 아파도 작업을 중지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휴가철에 나 같은 사람은 무슨 책을 읽을지 고민하지만, 누군가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생사를 오가는 경험을 한다.
앞으로의 과제는 명확하다. 다가올 재난에 대비한 사회안전망 확충이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춰져 있던 북유럽 국가에선 추가로 재정을 많이 쓰지 않고도 팬데믹 피해를 막아낼 수 있었고, 그 덕에 물가 상승, 국가부채 증가 등의 부작용도 비켜갈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중소기업과 비정규직까지 유급병가를 쓸 수 있게 제도를 정비하고, 시범 적용 중인 상병수당 제도를 조속히 안착시키며, 실직 뒤 재취업이 용이하도록 고용보험 적용 대상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아프면 쉴 수 있도록, 그리고 가족이 아플 때 돌봐줄 수 있도록 돌봄지원제도를 강화해야 한다.
팬데믹의 상처가 미래를 ‘더 낫게’ 바꾸려면,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복기하고 그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와 인식을 고쳐나가야 한다. 마침 실업급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는데, 부디 전대미문의 위기 중 상처 입은 사람들을 보듬는 방식으로 제도의 개선이 이뤄지길 바란다. 휴가철에 책을 읽든, 명품 선글라스를 끼고 해외여행을 가든, 한 인간으로서 온전해지는 삶의 양식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는 모두에게 고루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공동체의 역할이 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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