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손숙 "아픈 나를 연극 '토카타'가 일으켜 세웠죠"
[파이낸셜뉴스] 단출한 무대에 여자가 걸어 나와 말한다. “오랜만이에요. 벌써 2년쯤 됐나? 우리 못 만난 지가.” 그는 어느새 바닥에 앉아 달뜬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여전해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부드럽고 따뜻하고 다정한지.”
한쪽 의자에 앉은 쇠약한 남자도 과거의 어떤 순간을 떠올린다. “글쎄,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난 그걸 만지고 말았지…그냥 아무 생각 없었어.”(남자)
빈 공간을 채우는 독백 사이로, 가끔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의 독백이 마치 대화하듯 교차한다.
안무가 정영두는 천천히, 느리게 몸을 움직였다. 가만히 한 손을 하늘로 뻗어다가 그 손으로 자신의 몸을 어루만졌고, 때로 소리나게 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절제된 움직임을 부드럽게 이어갔다.
신시컴퍼니가 오는 8월19일부터 9월10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연극 ‘토카타’를 공연한다. '토카타'는 손숙 연극 인생 60주년 기념 연극이다. 제목인 ‘토카타’는 접촉하다, 손대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토카레에서 유래된 것으로 기교적·즉흥적인 건반음악의 형식을 뜻한다.
손진책 연출은 1일 ‘토카타’ 연습실 공개 및 기자간담회에서 “코로나로 인해 2여 년 간 서로 단절된 시간이 있었다. 이 작품은 거기로부터 나왔다”며 “심리적인 접촉과 물리적 접촉에 관한 연극”이라고 말했다.
등장 인물도 단출하다. 반려견을 떠나보내고 홀로 된 여인(손숙 분)과 바이러스에 감염된 극한 상황에서 한때 화려했던 접촉을 생각하는 중년 남성(김수현 분) 그리고 존재론적 고독을 몸으로 표현하는 춤추는 사람(정영두 분)이 출연한다.
특별한 내러티브도 없다. 손 연출은 “세 인물이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와 춤을 선보이는 독특한 4악장의 연극”이라며 “세 인물의 삼중주"라고 부연했다. 여기에 언덕을 옮겨 놓은 듯한 미니멀한 무대 디자인과 최우정의 음악이 더해질 뿐이다. 이날 행사에는 배우 손숙, 김수현과 배삼식 작가, 이태섭 무대미술가, 박명성 프로듀서가 참석했다.
손숙은 “60주년 기념 공연이라고 해서 달달한 로맨스를 기대했는데, 대본 보고 깜짝 놀랐다"며 웃었다. "근데 대본이 너무 신선했다. 배우가 해야 할 여지가 많았다. 좋은 작품 써줘서 배삼식 작가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배삼식 작가는 “때론 서늘하고 괴팍할 수도 있는 작품을 흔쾌히 받아준 손숙 선생님께 감사하다. 영광“이라고 말했다. 선배의 60주년 기념연극을 함께하게 된 김수현은 ”혹시나 작품에 누가 될까봐 스트레스 받으면서 하고 있다. 열심히 하겠다”고 각오를 전했다.
정영두 역시 “60주년 기념 연극에 함께하게 돼 영광”이라며 “즐겁고 기쁘게 참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 연출은 “대사가 음미할 부분이 많다. 대본이 마치 악보와 같아서 연기의 디테일이 많이 요구된다. 손숙의 연기를 보면서 연륜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 게, 삶을 저렇게 볼 수 있구나, 삶이란 이렇게 찬란하구나. 슬프다거나 고독한게 아니라 마치 삶의 찬가를 듣는 것 같았고 그렇게 느낄수 있도록 연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흔히 기념 공연은 배우의 대표작을 리바이벌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번 작품은 기존 기념 공연의 공식에 따르지 않은 신작일 뿐 아니라 장르적 측면에서도 획기적이다.
배삼식 작가는 “이 작품을 (손숙 배우님께) 써드리고 박정자 선생님께 많이 혼났다. 힘든 작품을 드렸다고. 그런데 작가로서 최선을 다하는 게 (손숙 선생님에 대한 ) 예의라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 관객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를 썼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서사가 없지 않다”면서 “대부분의 서사는 지난 2년, 팬데믹 기간 산책길에서 나왔다. 할 일 없던 시간에 혼자 걷던 시간에 생각했던 것들이다. 남녀의 행위를 보면, 여자는 끊임없이 (실제로) 산책하고, 고립된 남자도 기억을 더듬으며 (머릿 속을) 산책한다”고 설명했다.
“촉각은 우리 인간이 가진 감각 중 가장 오래됐다. 그런데 팬데믹으로 인해 인간 간 접촉이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 촉각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꾸밈을 최대한 배제했다. 순수한 목소리가, 무대에서 들려지길 원했다. 손숙 선생님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연습실에 올 때마다 기뻤다”며 손숙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손숙 역시 이번 작품에 애정을 드러냈다. “연극하며 살다보니 60년이 지났다”는 그는 “이번 연습을 하면서 지난 1963년에 내가 처음 무대에 섰을 때의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손 연출이 배우를 가만두지 않는다. 달달 볶는다. ‘손을 움직이지 말고 마음을 움직여라'는 둥 어려운 소리를 한다. 몸도 쓰게 만든다. 그래서 몸은 힘든데, 머리는 굉장히 맑다. 연습 나오는 게 오랜만에 설렌다.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배삼식 작품을 좋아하는 게 대본에 향기가 있다. 품위도 있다. 배삼식 작가의 작품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토카타’는 원래 상반기에 공연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손숙의 갑작스런 건강 악화로 하반기로 연기됐다.
손숙은 “결과적으로 이 작품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고 했다. "갑자기 아프면서 한 3개월 걷지를 못했다. 꼼짝없이 집에 있다 보니 거의 매일 하루에 한두 번씩 작품을 봤다. 눈이 나빠 대본을 녹음해 밤마다 들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이걸 해야지,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야지, 생각했다. 연극이 연기 돼 주변 사람들에게 죄송했지만, 나로선 연극이 연기된 게 모노드라마나 다름없는 긴 대사를 외우고, 완성도를 높이는데 굉장히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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