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 명예기자 리포트] 긴축 종료는 성장·침체 분기점…부채 관리 못하면 도약 없다
2010년 10월 경북 경주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미국 대표로 참석한 벤 버냉키 당시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충격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제로금리 정책을 계속할 것이며 6000억달러 규모의 2차 양적 완화를 시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제로금리와 양적 완화가 비전통적(unconventional)이고 일시적(temporary)인 조치라는 통념을 넘어선 것이었다. 일부 국가에서 미국 달러의 인위적 환율 절하라는 비판을 제기했으나 미국은 자국 경제가 잘못되면 세계 경제가 잘못된다는 논리로 밀어붙였고 결국 동의를 얻어냈다. 이로써 제로금리와 양적 완화는 각국이 위기에 대처하는 통상적인 수단이 됐다.
사실상의 긴축 종료…후유증 조짐
연준이 지난달 말 기준금리 상단을 5.50%로 0.25%포인트 인상했지만 시장에서는 사실상 금리 인상 종결로 받아들이고 있다. 금리 인상에도 당일 주식·채권 시장은 모두 강세를 보였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금리 인상 가능성을 열어 놓았으나 시장에서는 사실상 금리 인상 종결로 받아들인 것이다. 과거 사례로 볼 때 긴축 종료 후 큰 폭의 '머니 무브'가 일어나곤 했다.
긴축 기조로 움츠렸던 투자자가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추가로 확대·조정하기 때문이다. 긴축 종료를 예상한 발 빠른 투자자는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모펀드 업계 선두주자인 블랙스톤은 목표보다 3년이나 앞당겨 지난 6월 말 운용자산을 1조달러로 늘렸다. 아울러 일부 리스크가 커진 상업용 부동산 투자 펀드는 내용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긴축이 종료되고 머니 무브가 활발해진다고 경제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고강도 긴축이 남긴 후유증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에 금리를 많이 올렸기 때문에 그 영향이 중첩돼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1∼2년간 긴축 후유증을 어떻게 잘 관리하는지에 우리 경제의 앞날이 달려 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일본 사례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행은 뛰는 부동산 가격 등을 잡기 위해 1988년 9월에 2.50%였던 기준금리를 1990년 12월 6.0%까지 올렸다. 1989년엔 3%의 소비세도 신설했다. 그러나 자산 거품이 갑자기 꺼지면서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됐다. 긴축 후유증을 관리하지 못한 결과다. 공적 자금 투입, 금융기업 구조조정, 부실 채권 정리 등과 같은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가 있었다면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다. 긴축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긴축 '후유증' 관리가 잘못된 것이었다.
부실 정리 위한 배드뱅크 설립 검토를
대한상공회의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1600여 개 상장사의 이자비용은 고금리 영향으로 30% 이상 늘었다. 취약차주 대출은 규모와 함께 연체율도 동반 상승하고 있다. 지난 1분기 말 취약차주 대출 잔액은 94조8000억원으로 1년 전에 비해 1조2000억원 증가했다. 금융회사는 일부 자산의 부실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금융권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잔액은 3월 말 현재 131조원으로 연체율은 2%로 나타났다. 이 중 증권사의 부동산 PF 연체율은 16%에 달해 자칫 금융 불안의 뇌관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고금리 시대에 차입금이 많은 기업은 살아남기 힘들다. 업종 특성상 부채비율이 높은 해운·항공·물류 관련 기업이나 한계기업에 대해서는 정부와 주거래은행이 사업구조 개선, 자산 매각, 채무 재조정 등 선제적 구조조정 노력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우선 상징적 조치로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합병과 HMM(옛 현대상선) 매각을 조속히 마무리해야 한다. 금융연구원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말 신용등급 C등급 이하의 부실 징후 기업은 185개로 전년보다 25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팬데믹 이후 다소 소홀해진 정부·채권단의 구조조정 유도 노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실 자산이나 부실 채권을 소화할 수 있는 '배드뱅크(Bad Bank)' 설립도 고려해볼 만하다. 아울러 국회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의 재입법'을 추진해 채권단 위주의 신속한 정상화 노력을 지원해야 한다.
해외 부동산 등 대체투자도 부실화
국내 부동산 PF 부실 우려와 함께 해외 상업용 부동산 투자가 새로운 리스크 요인으로 등장했다. 국내 금융시장의 미성숙으로 장기투자 기회가 없는 상태에서 해외 부동산 투자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공실률이 높아지면서 일부 대체자산의 투자 손실이 현실화되고 있다. 현재 금융감독원은 전체 금융권에 대해 대체투자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점검 결과가 나오면 전면 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대체투자 자산의 가격 변동 상황을 상시 모니터링하는 대응 체계를 갖춰야 한다. 시장의 조그마한 불씨가 큰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긴축 후유증에 대해 여러 이유를 들며 손 놓고 있다가 '잃어버린 20년'의 침체를 겪었다. 긴축이 종료돼 대규모 머니 무브가 진행되면 투자자는 가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시장을 찾아다닐 것이다. 우리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찾아왔다. 긴축 후유증은 있으나 과거 두 번의 위기를 극복한 우리에게는 충분히 관리 가능한 수준이다.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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