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에 버텼지만, 지옥이 된 아파트
유일하게 멀쩡한 103동에
외부인 몰려 입주민과 갈등
2014년 웹툰 원작인데도
요즘 사건들이 자꾸 겹쳐
이병헌·박서준·박보영 열연
요즘의 우리는 철근 부족으로 무너진 아파트 주차장이나 빗물이 가득 들어찬 지하차도를 보며 재난의 원인을 찾고, 인재(人災) 여부를 확인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어떤 재난은 설명되지도,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게 다가온다. 엄태화 감독의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에서의 재난이 바로 그렇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대지진이 서울을 덮치는 충격적인 장면이 스크린 위를 덮는 시점은 관객의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강남 개발과 함께 아파트라는 생활양식에 점차 익숙해져 가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담은 과거 영상으로 영화가 시작된 직후, 땅이 일어나며 서울이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것이다. 지진 직후 모든 건물이 무너진 서울에서 유일하게 서 있는 황궁아파트 103동은 말 그대로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유토피아가 된다. 지진 직후 전기와 수도도 끊기고, 추위 속에 먹을 것마저 없는 상황이니 유일하게 남은 아파트의 가치는 현재 우리가 아파트에 부여하는 가치 이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배경 음악조차도 윤수일의 명곡 '아파트'다. 그런 소중한 아파트에 불이 나자 직접 뛰어들어 불을 끈 영탁(이병헌)은 부녀회장 금애(김선영)의 추천을 받아 입주민 대표가 되고, 외부인들로부터 아파트를 지키기 위해 앞장선다. 시간이 갈수록 '바퀴벌레'라 불리는 외부인들과 아파트 입주민들 사이의 갈등은 깊어져만 가고, 대출을 끼고 황궁아파트를 산 뒤 공무원과 간호사 부부로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던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도 휘말리게 된다.
요컨대 재난은 그저 재난일 뿐,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괴로운 상황 속에서 반응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이다. 이들의 반응에 따라 재난영화는 블랙코미디가 됐다가 때로는 스릴러스러운 장면으로도 치닫고, 한때 유토피아에 가까웠던 공간은 디스토피아로 굴러떨어지게 된다. 아파트 3층에 달하는 규모의 실제 세트 또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예시로 삼았다던 엄 감독의 말대로 그 자체로 훌륭한 출연자처럼 극을 이끄는 데 도움이 된다.
유독 조도가 낮은 이 영화의 서늘한 화면 속에서도 이병헌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빛난다. 어수룩한 모습으로 말을 더듬으며 등장한 영탁이 주민들을 이끄는 인재(人材)로 거듭나고, 나아가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구호를 반복적으로 뇌까리며 잔인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이뤄지는 변화는 그의 호연 없이는 설득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영탁의 부탁을 받아들인 뒤 방범대원으로서 외부인들과 싸우며 먹을 것을 구해오지만 과연 자신의 행동이 맞는지 고민에 빠지는 민성과 친절하게 남을 도우면서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명화를 연기한 박서준과 박보영 두 청춘 스타의 연기 역시 모자람이 없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인간적으로 구는 금애를 연기한 김선영 역시 감초라는 표현에 적절하게 들어맞고, 카메오로 짧은 시간 연기를 펼친 감독의 친동생 엄태구를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영화는 2014년 연재된 이후 호평을 모았던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의 2부 '유쾌한 이웃'을 원작으로 각색한 것이지만 공교롭게도 순살아파트와 전세사기 등 실재하는 문제들을 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우리가 현재 아파트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냐는 씁쓸하면서도 날카로운 질문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들이 그토록 높은 가치를 매기고 주목하는 아파트라는 존재가 또 다른 주인공이나 마찬가지기에 자신도 아파트에 사는 관객이라면 입주민 입장에서 외부인을 어디까지 허용해줄 수 있을지,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곳은 과연 천국일지 지옥일지 고민하게 된다.
[이용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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