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땅에서 전쟁하며 호황 누리는 러시아···전문가들 “버블 붕괴 우려”
미국과 유럽은 지난해 2월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부터 러시아에 각종 ‘제재 폭탄’을 퍼부었다. 서방 주요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을 대거 이탈했고 러시아 은행들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망에서 퇴출됐다. 제재 여파로 러시아 경제는 지난해 마이너스 2.1% 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 500여일이 지난 지금 러시아 경제는 활발한 내수를 바탕으로 서방 전문가들의 예상을 넘어서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러시아중앙은행은 올해 러시아 경제가 2.5% 성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는 전쟁 전인 2021년(5.6%)보다는 낮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2.2%)보다 높은 수준이다.
러시아 공장들은 군수품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3교대로 24시간 가동 중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직물 공장들은 인력과 원자재 부족으로 밀려드는 군복 주문을 처리하지 못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중부 스베르들롭스크의 한 탱크 공장은 최근 납기를 맞추기 위해 인근 교도소 수감자 수백명과 근로계약을 체결했다. NYT는 러시아의 경제 활동이 사실상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러시아 상위 20개 은행 담보대출이 올해 상반기에 전년 대비 63% 성장하는 등 부동산 시장도 활황이다. 실업률은 거의 제로(0)에 가깝다. 전쟁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으로 공기업과 사기업이 서로 구인 경쟁을 벌이면서 실질 임금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급기야 인플레이션을 우려해 지난달 21일 16개월 만에 처음으로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러시아 경제가 서방 제재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을 걱정할 정도로 호황을 누리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민심 이반 등을 우려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이 돈을 풀어 인위적으로 경기를 부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재정 지출은 올해 첫 다섯달 동안 2021년 동기 대비 50% 이상 증가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최저임금을 10% 인상하고 연금지급액도 20%가량 올렸다. 대출 지원에도 적극적이다. 올해 1분기 가계 대출의 절반은 생애 최초 주택구입자 대출 지원, 군인들에 대한 우대금리 제공 등의 형태로 정부 지원을 받았다. 기업 대출은 올들어 지난 6월까지 전년 대비 19% 증가했다.
전쟁은 상대적으로 빈곤한 계층의 주머니도 채워주고 있다. 전선의 병사들이 고향으로 보내는 돈은 해당 지역 가계의 평균 소득보다 높다. 전사한 병사들의 유족들에게는 1년 소득을 상회하는 보상금이 지급된다. 우크라이나 국경과 가까운 곳들과 2014년 러시아가 강제합병한 크름반도 등 주변부 지역들도 물자와 군인들이 몰리면서 경제적 혜택을 보고 있다.
국민들의 늘어난 소비 여력은 서방 제재로 사실상 해외 여행이 불가능해진 덕에 내수 시장을 떠받치는 데 사용됐다. 이 같은 선순환에 힘입어 지난 6월 여론조사에서 푸틴 대통령 지지율은 조사 기간이 바그너 그룹 반란 사태와 겹쳤는데도 81%를 기록해 전달보다 1% 포인트 떨어지는 데 그쳤다.
그러나 러시아의 내수 호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불확실하다. 지출은 늘어난 반면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에 대한 제재로 에너지 판매 수입은 급감하면서 러시아는 올해 4월까지 3조4000억루블(약 59조원)의 재정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1조2000억루블(약 28조원) 흑자였다. 전쟁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도 성장을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거품 붕괴 가능성도 제기된다. 베를린 소재 카네기 러시아 유라시아 센터의 연구원이자 전 러시아 중앙은행 고문인 알렉산드라 프로코펜코는 “이 거품이 어떻게 꺼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카드의 집’처럼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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