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나조차도 무서웠던 내 연기…CG인가 했죠"
"배우는 불안과 자신감 오가는 직업…순수함 잃지 않으려 발버둥"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왕을 대역한 광대('광해')부터 살인마를 추적하는 요원('악마를 보았다'), 사랑 때문에 보스에게 쫓기는 남자('달콤한 인생'), 거대 권력에 맞서는 건달('내부자들')까지.
이병헌은 영화를 캐릭터로 기억하게 하는 몇 안 되는 배우 중 한 명이다. 오는 9일 개봉하는 엄태화 감독의 신작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도 그 힘을 발휘한다.
이 영화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유일하게 남은 '황궁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병헌은 생존을 위해 점차 광기에 사로잡혀가는 새 입주민 대표 '영탁'을 연기했다. 숫기 없고 평범한 동네 아저씨가 피 칠갑을 한 잔혹한 리더로 변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1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눈빛 연기에 대한 호평을 듣자 "요즘 배우들은 눈알을 몇 개씩 가지고 다닌다"는 농담으로 맞받았다.
"완성본을 어제 시사회에서 처음 봤거든요. 저조차도 '와, 나한테 이런 얼굴이 있었나' 생각이 들게 하는 장면이 있더라고요. 제가 보는데도 제 모습이 무서웠어요. 'CG(컴퓨터그래픽)인가? 왜 저런 눈빛을 하고 있지?' 싶었죠."
영탁은 영화 초반부에선 나약하고 어리바리해 보이는 남자로 묘사된다. 덜컥 대표가 된 직후에는 나름대로 선을 지키며 주민들을 이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독재자처럼 변화한다.
이병헌은 영탁을 연기할 때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우울한 가장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영탁은 한 번도 리더가 되어 본 적 없는 평범한 소시민이에요. 을(乙) 중에서도 을인 사람에게 권력이 생긴 상황이잖아요. 영탁은 커지는 권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다 보니 자기 안에서 광기가 생겨나는 거죠. 다만 절대적인 악인은 아니에요. 이 영화 어디에도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다 상식적으로 나쁜 사람들이거나 상식적으로 착한 사람들이죠."
이 같은 캐릭터 분석 덕분인지 극 중 이병헌은 영탁 그 자체로 보인다. 그는 촬영장에서 대본을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한다. 장면 하나를 찍더라도 여러 가지 버전으로 연기를 준비해, 엄 감독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의견도 적극적으로 전달했다. 덕분에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대사가 바뀌거나 만들어지고, 시나리오에는 없던 장면이 추가됐다.
일각에선 톱스타인 이병헌이 주로 독립영화를 연출해온 엄 감독의 작품에 나온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이병헌은 "시나리오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며 "감독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어떤 색깔로 영화가 만들어질지 느낄 수 있었다"고 출연을 결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일단 이야기의 힘을 믿어요. 저는 이 영화가 단순히 재난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휴먼 드라마나 스릴러도 아니고요. '스릴러가 강한 휴먼 블랙코미디' 장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복합적인 색깔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말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끊임없이 장르가 바뀌는 느낌을 준다. 영탁이 변모하는 모습에 맞춰 작품 분위기도 변화한다.
하지만 정작 이병헌은 자기 연기에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고 한다. 오직 상상으로만 영탁이 마주한 상황을 가늠하고 감정을 이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내가 이렇게 연기를 하는 게 맞나, 아니면 어떡하지' 하고 의심하는 순간이 있어요. '콘크리트 유토피아'처럼 강한 감정이 나오는 영화는 특히 그렇죠. 사람들에게 보이기 전까지 불안감이 크더라고요. 그래도 다행히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이럴 땐 불안이 자신감으로 바뀌기도 해요. 배우란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는 직업이 아닐까 싶어요."
1991년 데뷔한 이병헌은 배우로만 32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도 맡는 작품마다 다른 인물로 보일 정도로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를 선보이고 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는 질문에 이병헌은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는 발버둥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마이클 만 같은 감독님을 보면, 어떻게 그 연세에 점점 더 멋있고 세련된 작품을 만들까 감탄하곤 해요. 나이가 들수록 힘 있고 창의적이잖아요. 전 그런 사람의 안에는 아이 같은 순수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내는 거죠. 순수함이 사라지면 (배우로서) 빛도 사그라드는 거예요. 이걸 잃지 않으려고 마음 속에서 내내 상기하고 있습니다."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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