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보다 강한 법무장관?…이스라엘 사법부 무력화 설계자, 야리브 레빈[시스루피플]
종조부 영향으로 엘리트주의 타파 운동
2009년 정계 입문부터 사법개편 강조
반대 의견 무시하는 태도에 지지자 환호
일각에선 “광적인 돌진에 우려” 지적도
“이스라엘의 진짜 총리는 야리브 레빈 법무장관이다”
이스라엘 일간지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사법개편 법안 강행 처리를 분석하며 내놓은 논평이다. 레빈 장관은 이스라엘 사법부 무력화의 설계자로 불린다. 장관 임명 등 행정부의 주요 결정을 대법원이 뒤집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사법부에 관한 기본법 개정안’은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지난달 24일 사법개편 법안 표결이 진행된 예루살렘 의회(크네세트)는 사실상 레빈 장관의 독무대였다. 네타냐후 총리는 표결이 끝나자마자 황급히 의회를 빠져나갔지만, 레빈 장관은 극우 연정 의원들로부터 연신 기념사진 촬영 요청을 받았다. 이어 내각을 대표해 연단에 올라 사법개편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가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뎠다”라고 말하자 의석에선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이스라엘 정계에선 네타냐후 총리보다 레빈 장관을 실력자로 보는 시각이 많다. 고령에 건강 문제까지 겹친 네타냐후 총리 뒤를 이을 1순위 후보로 거론된다. 그는 어떻게 이스라엘 극우 정치의 대표 얼굴이 됐을까?
이스라엘 유력 매체 하레츠는 사법개편에 대한 그의 집착이 10대 시절 이미 형성됐다고 전했다. 하레츠에 따르면 레빈 장관은 1969년 예루살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예루살렘 히브리대 언어학과에서 아랍어를 가르친 교수였고, 어머니는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아시아·아프리카 분야 책임자였다.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셈이다.
하지만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따로 있었다. 할아버지의 남동생인 종조부는 1948년 중동전쟁 당시 메나헴 베긴 전 총리가 이끌던 유대인 민병대 소속 대원이었다. 이스라엘은 전쟁 초반 아랍 연합군에 크게 밀렸는데, 종조부는 판사와 의사 등 소위 엘리트들의 안일한 정신 때문이라고 믿었다.
이에 레빈 장관은 예루살렘 히브리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엘리트주의 타파 운동에 앞장섰다. 지금의 이스라엘 사법 체계를 구현한 인물로 꼽히는 아론 바락 대법원장이 2006년 퇴임하자 “대법원장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관습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2009년 정계에 입문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사법개편을 기치로 내걸었다. 뉴욕타임스(NYT)는 “네타냐후 총리는 애초 사법부 독립을 지지하는 인물이었지만, 2017년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은 이후 사법개편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며 “하지만 레빈 장관은 뼛속까지 사법개편론자였다. 이 점이 보수 유권자를 사로잡았다”고 설명했다.
원하는 성과를 얻기 위해 반대 의견을 무시하는 강경한 태도도 지지자들에겐 매력 포인트로 작용했다. 하레츠는 “지난 1월 사법개편안을 처음 설명하는 기자회견에서 그는 오만하고 호전적이고 반항적인 수사를 사용했다”며 “폭탄을 터뜨린 다음 날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떠났다”고 지적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2015년 레빈 장관에게 법무장관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당시 리쿠드당과 보수 연정 상당수가 온건파라는 점을 들어 거절했다. NYT에 따르면 그는 이후 사석에서 “나의 사법개편 꿈을 방해할 사람이 당에 너무 많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극우 정당이 약진했고, 네타냐후 총리가 이들과 연정을 이루면서 레빈 장관은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레빈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사법개편에 찬성할 장관과 의원을 모두 포섭했다”며 “사법개편에 부정적이었던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도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NYT도 “네타냐후 총리는 자신에게 끝까지 충성할 장관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그가 레빈 장관을 끝까지 다독이고 달래는 이유”라고 평가했다.
다만 이러한 독단적인 성격이 결국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레츠는 “리쿠드당에서도 일부 구성원은 그의 광적인 돌진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고 꼬집었고, NYT는 “레빈 장관의 인기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위기를 촉발했다”고 진단했다.
한편 에스더 하윳 대법원장은 이날 사법개편 법안과 관련한 위헌심사(사법심사)를 다음 달 12일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심사엔 대법관 15명 전원이 참여할 예정인데, 이는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성문헌법이 없는 이스라엘에선 기본법이 사실상 헌법 역할을 하고 있는데, 대법원이 사실상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을 폐기한 사례는 거의 없다. 따라서 대법원이 만약 사법개편 법안을 위헌으로 판단하고 파기를 명령할 경우 이스라엘 사회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레빈 장관은 지난 3월 “이 법이 무효가 된다면 우리는 모든 한계선을 넘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사법부와 레빈 장관의 진정한 맞대결이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손우성 기자 applepi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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