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강한, 서평연대 열두 번째[출판 숏평]

기자 2023. 8. 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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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최현숙 지음 / 문학동네)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



‘1호선 빌런 도감’이라는 오래된 밈이 있다. 잊을 만하면 누군가 전철에서 특이한 옷차림이나 행동을 하는 승객을 찍은 사진을 모아 올리고, 댓글로는 ‘서울 전철 1호선에 유독 노인이 많아 특유의 냄새가 심하고 시끄럽다, 출퇴근에 방해가 되니 노인 무임승차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오간다. 그 속에서 노년은 도촬과 유포에 항의하기는커녕 게시물을 읽으리라고도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노년은 흔히 비생산적이고 때로 위협적인,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모름은 두려움을, 두려움은 혐오를 낳는다. 이 책은 한 사람의 노년으로서 자신을 소재로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공교롭게도 1호선 애용자다) 냄새, 과오, 노화에 따른 외모의 변화, 성욕, 돈과 가족을 두고 ‘속 시끄러운’ 마음을 펼쳐 널어놓는다. 모름이 궁금함으로, 알 듯한 마음이 친밀감으로 번져 간다. 행선지를 알려 주지 않는 기차 안에서, 먼저 어디쯤까지는 다녀온 승객 한 명을 알게 된 것 같은 마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서경 / 출판편집자, 9N비평연대)

서경



■암컷들(루시 쿡 지음 /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암컷들



우리는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패러다임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현상을 왜곡해 받아들이거나 부정한다. ‘암컷들(Bitch)’은 도발적인 제목만큼 과감한 연구로 동물의 암수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순 책이다. 루시 쿡은 동료 생물학자들과 함께 그동안 동물의 암컷에 대해 연구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적극적인 수컷, 수동적인 암컷’은 거짓이라는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남성 생물학자들도 이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윈 이래로 내려온 정설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연구 결과를 편집하고 선별했다. 사실을 중요시하는 과학이 왜곡된 인식에 굴복한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사실은 암컷도 진취적이고 방탕할 수 있다’라는 선언에 그치진 않는다. 결정적으로 ‘원래 그래’라는 단순한 게으름, 왜곡된 패러다임이 어떻게 과학과 진실을 굴복시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윤인혁 / 사회문화비평가, 9N비평연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홍보위원)

윤인혁



■행복은 먹고 자고 기다리고(미즈나기 토리 지음 / 심이슬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

행복은 먹고 자고 기다리고



맛있는 음식이 등장하지 않는 요리만화. 화려하고 다양한 음식과 이를 맛보는 ‘미식’의 기쁨에 몰두하지도,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지나치게 많은 열과 성을 들이지도 않는다. 어느 날은 편의점 음식을 먹고 어느 날은 근처 식당에서 흔한 메뉴를 주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음식을 고르고, 재료를 구매하고, 요리하고, 잘 차려서 먹는 일련의 과정들을 결코 혼자 해내지 않는다. 직장 동료와 이웃과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이다. 요리만화가 ‘음식과 나’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음식들을 과감히 조연으로 미루어 놓은 대신 식탁에 마주앉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잔잔하지만 내실 있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박소진 / 문화평론가, 웹소설작가, 9N비평연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홍보위원)

■기꺼이 헤매는 마음(임승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

기꺼이 헤매는 마음



차오르고 남은 나날들의 기록. 고요하고 깊다. 다큐멘터리 작가답게 삶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세심한 관찰력이 놀랍다. 갈피마다 묻어 있는 삶의 순간순간이 생생히 빛난다. 좋은 에세이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글쓴이의 삶에 읽는 이의 생이 포개어진다. 겹쳐진 ‘나’와 ‘당신’이라는 화두를 품고 어느 느긋한 카페에서 이 언니에게 묻고 싶다. “아·라(아이스카페라테) 한 잔?”

이 책의 추천사입니다. 저자는 말해요. “때로 ‘믿음’이란 말은 ‘기대’와 비슷한 용도로 쓰이기도 하는데, 둘은 분명히 다르다. 기대는 기대 이상의 것을 바랄 때 쓰이고, 믿음은 있는 그대로의 것을 믿을 때 쓰인다”라고요. 저자는 20대 때 암에 걸려 힘들었던 일, 자라면서 느낀 슬픔과 어려움, 불안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 저자의 이야기는 마치 우리, 또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비슷해서 공감을 자아내지요. (김미향 / 출판평론가, 에세이스트)

김미향



■일요일의 음악실(송은혜 지음 / 노르웨이숲)

일요일의 음악실



예술의 진정한 매력을 느끼는 최종적 감각을 나는 촉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에 살처럼 직접 닿는 그런 느낌. ‘일요일의 음악실’은 클래식 음악과 우리의 내면이 어떻게 닿을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탁월한 표현력과 문장을 통해서 말이다.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새뮤얼 바버가 이탈리아에 유학하고 있던 1936년에 작곡한 현악 4중주 1번의 제2악장을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이름만으론 좀 생소하지만, 실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곡이다. 2001년 911테러 희생자의 추도식에서 연주됐다. 얼마 전 왕위에 오른 찰스 3세의 전 부인 다이아나비의 장례식에서 연주된 것도 바로 이 곡이었다. 멀게는 1963년 케네디 대통령 장례식에서도, 아인슈타인과 그레이스 캘리 모나코 왕비의 장례식에서도 연주됐다. 문득 ‘현을 위한 아다지오’가 연주되고 있는 나의 장례식을 떠올렸다. ‘나는 과연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곡에 어울릴 만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욕망이 아니라 어떻게든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성신 / 출판평론가, 9N비평연대)

김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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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엄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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