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막 무법천지' 현실로…전국 거리에 막말·비방 난무
기존 정당 현수막 난립 속 '엎친 데 덮친 격'
(전국종합=연합뉴스) 국회의 입법 미비로 선거법상 현수막·벽보·인쇄물 금지 조항들이 1일부터 효력을 잃으면서 현수막 난립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이미 지난해 옥외광고물법 개정으로 원색적인 비방이나 막말을 담은 정당 현수막들이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이번 '입법 공백' 사태까지 겹치면서 무질서와 혼란이 가중되는 양상이다.
거리 곳곳에 정치 현수막 공해…불쾌지수 고조
이날 오전 10시께 서울 강서구 발산역 사거리에는 모든 방향으로 각종 정당 현수막 13개가 걸려 있었다.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진보당이 현수막을 내걸어 어느 쪽을 둘러봐도 현수막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행인 송모(70)씨는 "현수막들이 너무 자극적인 문구를 담고 있어 보기에 거북할 때가 많다"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을 오가는 시민 중에는 현수막 내용에 아예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대학생 이모(22)씨는 "계속 걸려있는데 사실 제대로 본 적은 없다"며 "보기에도 지저분하고 자원 낭비라는 생각만 든다"고 말했다.
대전에서는 더불어민주당 대전시당이 국민의힘 시의원 일부가 겸직을 유지하는 것을 겨냥해 '시의원인가 업자인가'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시내 곳곳에 내걸어 시의회 파행으로 번졌다.
국민의힘 시의원들은 "사실 입증이 되지 않았음에도 시의원들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며 사과를 요구했고 민주당 시의원 4명은 이에 맞서 지난달 17일부터 31일까지 의사일정 참여를 거부하고 농성했다.
광주광역시에서도 자유민주당이 '중국원전 핵폐수는 후쿠시마의 50배…왜 중국에는 말 못해'라는 현수막을 내걸자 중국인 유학생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이를 훼손하면서 경찰 고소까지 이어지는 소동을 빚었다.
광주에서는 진보당이 '윤석열 지우는 게 국익', '일본의힘이 진짜 반국가세력' 등의 원색적인 현수막을 곳곳에 게시하기도 했다.
제주에서도 우리공화당 등이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라는 현수막을 걸어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이를 철거하는 등 갈등이 증폭되기도 했다.
24명의 사상자를 낸 청주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관련해 더불어민주당 충북도당이 국민의힘 소속 김영환 지사를 겨냥해 '김 지사는 도민 생명보다 땅이 더 소중합니까?'라는 현수막을 걸자 국민의힘은 '민주당은 도정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현수막으로 반격했다.
여기에 진보당 충북도당은 '고속도로, 명품쇼핑…거니 몫'이라는 현수막을 게시해 논란이 됐다.
울산에서는 '바보야!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 무능이다', '법치부정 범죄옹호 이재명과 비겁한 138표' 등의 현수막이 걸리자 이를 철거해달라는 민원들이 지방자치단체로 접수되기도 했다.
수원에 사는 60대 박모씨는 "현수막이 무분별하게 걸려 외관상 좋지 않아 보인다"며 "시민들에게 꼭 필요한 현수막을 제외하고는 모두 걷어내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제철거 나선 지자체 있지만 시민 불편 당분간 지속될 듯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선거법의 관련 조항들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올해 7월 31일까지 법을 개정하라고 시한을 정했다.
어떤 선거든 180일 전부터 이런 행위들을 전부 금지하는 것이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야의 시한내 선거법 개정 합의는 무산됐다.
이에 따라 선거법의 관련 조항들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누구든지 아무 때나 선거 현수막을 내걸고 유인물을 뿌릴 수 있게 됐다.
여야 지도부는 뒤늦게 8월 임시국회 내에 반드시 선거법 개정안을 처리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일부 법 조항에 대한 이견 해소가 변수로 남아 있어 처리 시점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일선 지방자치단체들은 주민들의 민원 때문에 정당현수막 강제철거에 나서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 이유로 철거율이 높진 못하다.
인천시는 전국 최초로 지난달 12일 정당현수막 강제철거에 나섰지만, 같은 달 20일까지 철거된 정당현수막은 348개에 불과해 여전히 많은 정당현수막이 시내 곳곳에 걸려 있다.
일선 현장에서는 인천시 조례가 상위법과 충돌하는 데다 정당이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경우 현장 공무원에 대한 보호 장치가 없어 적극적인 철거가 어렵다는 분위기다.
인천시는 지난 5월 옥외광고물 조례를 개정해 지정 게시대에 걸 수 있는 정당현수막을 국회의원 선거구별 4개 이하로 제한했지만, 행정안전부는 상위법 위임이 없어 위법하다며 대법원에 제소했다.
김송원 인천경실련 사무처장은 "정치권에서는 일정한 정도의 현수막 게시를 금지하는 게 정치적 자유를 제한한다고 주장하지만, 대다수 시민은 현수막을 보행자 안전을 위협하고 도시 미관을 해치는 공해로 인식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여야는 민생 현안을 챙기는 차원에서 현수막을 조정할 수 있는 입법을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잔디 김준범 변지철 천정인 김솔 차근호 황수빈 전창해 이상학 최재훈 김용태 이준영 신민재 기자)
sm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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