商社의 부활 [이슈&뷰]
강한 글로벌 네트워크 존재감 커져
자원개발·신사업 뿌린 씨앗 성과로
경기침체 ‘진격의 돌파구’ 저력 확인
‘수출 선봉장’, ‘고연봉 직장’, ‘가장 뛰어난 인재가 모이는 곳’
한국의 무역 사업이 절정에 이르렀던 2000년대 전만 해도 종합상사의 몰락을 점치는 사람은 없었다. 이른바 돈이 되는 모든 것을 팔아치우며 상사 전성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와 ‘금융위기’가 상사의 발목을 잡았다. 사업 통폐합과 구조조정, 공장 매각 등 끝 모를 추락이 상사업계를 덮쳤다. 심지어 ‘상사로 돈 버는 시대는 지났다’, ‘상사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졌다’ 등 존재감 자체에 대한 부정론까지 나왔다.
이처럼 바닥 끝까지 떨어졌던 종합상사들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지정학적 시대 글로벌 공급망 위기 속 상사가 글로벌 구석 곳곳에서 구축했던 네트워크가 진가를 발휘하면서다. ▶관련기사 4·5면
이는 경기 침체에도 상사가 진격할 수 있는 반전의 버팀목이 됐다. 현재 저마다의 돌파구를 찾으며 ‘맨땅에 헤딩하는’ 상사맨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나락으로 떨어졌던 상사는 이처럼 완벽하게 부활하며 여전히 ‘돈 되는 모든 사업’을 하고 있다.
국내 종합상사업계는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환율과 원자재 가격이 동반 상승한 영향이 컸다. 이 같은 기저효과로 올해 실적은 전년 대비 감소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주요 에너지·원자재 가격의 하향 안정화로 트레이딩(중개무역) 마진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글로벌 경기 침체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달랐다. 주요 상사는 교역량 감소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선방했다. 당장 2분기만 하더라도 시장전망을 상회하는 영업이익을 거뒀다. 일부는 지난해 동기보다도 좋은 실적을 기록했다.
업계 맏형격인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지난해 2분기보다 366억원 많은 3572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올해 초 포스코에너지와 합병한 영향도 있지만 에너지·글로벌·친환경 부문에서 고르게 실적을 냈다.
현대코퍼레이션도 전년 동기 대비 29.6% 늘어난 270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삼성물산 상사부문의 2분기 영업이익은 1140억원으로 전년 대비 소폭 줄어드는 데 그쳤다.
LX인터내셔널은 영업이익 내림 폭이 컸지만 예년과 비교하면 나쁜 실적은 아니다. 주요 트레이딩 품목인 LCD(액정표시장치) 패널 시황이 악화된 탓에 타사에 비해 타격이 컸다. 인도네시아 니켈 투자 성과가 반영되는 하반기부터는 실적 흐름이 개선될 것으로 LX인터내셔널은 기대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상사의 전통 사업 영역인 트레이딩 부문의 실적은 쪼그라들었지만 각 사가 수년간 씨앗을 뿌려둔 신사업에서 성과가 나타나면서 대외 불확실성에 따른 충격이 크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돈 되는 사업은 다 한다’는 개척 정신으로 신사업에 뛰어든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상사의 이런 선전은 오랜 기간 부침을 겪어왔던 업계의 재도약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상사는 1970년대부터 국가 수출의 선봉장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99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사세는 기울었다.
특히 정보기술(IT)의 발달로 각 기업이 해외 영업망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상사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로는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10년 전인 2013년 주요 상사의 연간 영업이익이 올해 1개 분기 실적에도 못 미친다는 게 이를 방증한다.
포스코인터내셔널(당시 대우인터내셔널)의 2013년 영업이익은 1588억원이었고, LX인터내셔널(당시 LG상사)과 삼성물산 상사부문, 현대코퍼레이션(당시 현대종합상사)도 각각 982억원, 857억원, 219억원에 불과했다.
초라한 실적은 사업부 통폐합과 인력 구조조정이라는 ‘칼바람’으로 이어졌다. 당시 대우인터내셔널은 옛 대우그룹의 모체인 대우실업이 운영해 온 부산 섬유공장을 처분했고 중국, 미얀마 등 해외 소재 공장도 줄줄이 매각했다. LG상사도 한국상용차, 픽스딕스, 트윈와인 등 자회사 상당수를 정리했다. 삼성물산 상사부문의 경우 2012년 직원 일부를 그룹 내 다른 계열사로 전환 배치하는 등 인력을 줄이기도 했다.
상사업계가 신사업 창출 등으로 돌파구를 찾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10여 년간 이어진 각 사의 포트폴리오 다각화 움직임은 재기의 발판이 됐다. 최근 공급망 이슈로 네트워크를 가진 상사의 존재감이 부각된 상황에서 트레이딩 외 자원개발, 사업투자, 현지 생산판매, 사업 기획·설계·수행 등 다른 영역에서까지 경쟁력을 갖추면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친환경·에너지 분야에 힘을 실으며 다가오는 탈탄소 시대 관련 시장을 선도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2차전지를 포함한 친환경 소재와 태양광, 수소 등 신재생에너지 관련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최근 포스코인터내셔널과 LX인터내셔널 등 주요 상사의 주가가 크게 오른 것도 업계 재기에 기대감이 작용한 결과로 읽힌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수소 및 2차전지 밸류체인 역할 확대 측면에서, LX인터내셔널은 HMM 인수 추진을 포함한 인오가닉(M&A·지분투자) 성장 전략과 관련해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당분간 글로벌 경기 불황에 따른 무역 부문 매출 감소가 불가피하겠지만 그간 체질 개선을 위해 전략적으로 개척해 온 신사업의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며 “신사업 투자 성과가 반영되면 안정적인 실적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은희 기자
ehki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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