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표현, 명징한 메시지… “심심한데 끌리는 평양냉면 같은 작품”
텅빈 캔버스에 글자 덩그러니
진지한 고민 간결하게 풀어내
회화·조각·영상 등 72점 선봬
초창기 작업까지 30년史 망라
‘노란 비명 그리기’ 등 눈길끌어
‘풍경#1’로 이름 붙여진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텅 빈 캔버스에 글자만 덩그러니 적혀 있어서다. “LOOK AT THIS BLUE SKY(이 파란 하늘을 보시오)” “STARE AT THIS TREES(이 나무들을 응시하시오)” “LOOK AT THE FLOWING RIVER HERE(흐르는 강을 보시오)”라고 쓰여 있다. 따라 읽으니 머릿속에 목가적인 풍경이 하나 떠오른다. 비로소 작품이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다.
올해 초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가 중 하나인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을 내걸었던 리움미술관이 또 한 번의 발칙한 전시를 마련했다. 지난달 27일 서울 한남동 리움에서 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을 개최했다. 최근 부쩍 늘어난 젊은 미술애호가들에게 한국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작가의 30년 작품세계를 총망라한 이번 전시는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72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리움 관계자는 “그간 국내외에서 열렸던 작가의 전시들이 많아야 20점 내외의 작업물로 이뤄진 것과 달리 개인소장가들이 가지고 있어 접하기 어려운 초창기 작업물까지 공수했다”며 “이 정도 규모의 전시는 앞으로도 보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으로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김범은 젊은 예술가들에겐 ‘작가들의 작가’로 꼽힌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홍콩 M+ 등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수집가들이 김범의 작품을 소장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개념미술 거장이지만 대중에겐 꽤 생소하다. 워낙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데다, 개인전도 자주 열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전시도 이번이 13년 만이다. 한국 대표 사립미술관으로 꼽히는 리움도 작가를 설득해 어렵게 전시를 성사시켰다.
의도한 것은 아니라지만 이번 전시는 앞선 카텔란의 국내 첫 개인전 ‘WE’와 겹치는 지점이 여럿 있다. 이탈리아와 한국을 대표하는 개념미술 거장이란 점 외에도 재치 있고 익살맞은 방식으로 질서를 허물고 위계관계를 뒤엎는 주제의식이 닮았다. 리움에 발 도장을 몇 번 찍어본 관람객이라면 자연스럽게 ‘리움이 올해는 개념미술 상·하편을 기획했나’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김범과 카텔란을 개념미술의 범주로만 묶어선 안 된다. 김범이 작품을 고민하고 표현해내는 방식은 카텔란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잘 와 닿지 않는다면 요즘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 사이에서 유행하는 성격유형검사 MBTI를 떠올리면 쉽다. 카텔란이 외향적인 성향의 E형 작가라면, 김범은 내향적인 I형 작가로 규정할 수 있다. 리움 관계자는 “카텔란이 자극적이고 직접적이라면 김범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고되게 작업해 간결하게 풀어내는 미니멀리스트”라고 했다.
김범의 작품은 군더더기가 없다. 자신의 미술적 역량을 뽐내기보단 덜어내는 데 집중한다. 표현이 단순해질수록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작가의 철학적 메시지가 명징하게 드러난다. 이런 이유로 그의 작품을 본 관람객들은 김범을 평양냉면에 비유하기도 한다. 리움 관계자는 “심심한데 자꾸 끌리는 그런 맛이 있지 않느냐”며 “김범의 작품들도 보는 순간 탄성을 지르기보다 전시를 보고 난 후에도 계속 곱씹게 된다”고 말했다.
인상적인 작품은 2012년 제작한 ‘노란 비명 그리기’,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는 물활론(物活論)적 철학을 바탕으로 제작과 출산을 동일시해 표현한 ‘임신한 망치’, 가로 3.5m·세로 5m에 달하는 거대한 미로 ‘친숙한 고통 #13’ 등이다. 이 중 ‘노란 비명 그리기’는 화가가 캔버스에 붓질할 때마다 “으악”하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담긴 영상 작품으로 눈길을 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불확실한 개념까지 작품에 담아내려는 예술가의 위트가 돋보인다. 김성원 리움 부관장은 “김범의 작업은 보이는 것과 실체의 간극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의 결과”라며 “특유의 재치로 우리를 웃게 만들지만 농담처럼 툭 던진 의미심장한 이미지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12월 3일까지.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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